본디 책을 읽지 않았거늘(劉項元來不讀書)
2021.05.23 00:15
어제(5월 21일)가 소만(小滿)이었다.
이름하여 햇볕이 풍부하여 만물이 자라 천지에 가득 찬다(滿)는 절기인데,
하늘의 심사가 뒤틀렸는지 거의 종일토록 흐리고 비가 내렸다.
누군가 하늘을 노하게 했나 보다.
여야(與野) 할 것 없이 4.7. 보궐선거 후 한 달 만에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정치풍토,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상식인지 헷갈리게 하는 작금의 세태,
이 모든 것이 하늘을 화나게 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촌부가 어찌 하늘의 뜻을 헤아리랴.
아무튼 비록 비바람이 일시적으로 심술을 부리기는 할망정,
여름의 문턱이 코앞에 다가온 것은 분명하다.
조선 헌종 때 정학유(丁學游)가 지은 가사(歌辭)인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도
‘4월(양력으로 5월. 필자 주)이라 맹하(孟夏) 되니 입하, 소만 절기로다.’라고 했다.
맹하는 초여름을 뜻하는 말이니, 여름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내기를 끝낸 논은 하루가 다르게 푸르름을 더하고,
금당천의 녹음 또한 짙어만 간다.
재미있는 것은,
소만 즈음의 시절에 모든 산야에 녹음이 우거지는데,
유독 대나무는 반대로 푸른빛을 잃고 누렇게 변한다는 것이다.
벌써 단풍이 들리는 없고, 이유인즉,
새롭게 탄생하는 죽순에 영양분을 공급해 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의 누런 대나무를 가리켜 '죽추(竹秋)'라고 한다.
마치 자기 몸을 희생하며 온 정성을 기울여 젖먹이 아기를 키우는 엄마의 모습이라고 할까.
그나저나 옛날에는 소만 무렵이 '보릿고개’란 말로 대변될 정도로 살기 힘든 절기였다.
전년도 가을에 추수한 쌀은 떨어지고, 햇보리는 아직 나오지 않아 끼니를 이을 양식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식량이 남아도는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은 보릿고개라는 말 자체를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지 않을까.
그런데 탑골공원의 무료급식소를 찾는 분들의 발길이 다른 때보다 더 길게 이어지는 것은 또 무언가.
금당천에 어둠이 깔리고 백로와 왜가리들이 자기 둥지로 돌아오면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개구리 울음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
한낮에 올라갔던 기온이 도로 떨어지며 바람도 불고 쌀쌀하다.
“소만 바람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이 괜히 생긴 게 아닌가 보다.
그래서일까, 책장을 들추다 도연명(陶淵明)의 아래 시에서 눈길이 멈춘다.
風來入房戶(풍래입방호)
中夜枕席冷(중야침석랭)
氣變悟時易(기변오시역)
不眠知夕永(불면지석영)
바람이 방 안으로 스며들어
한밤중 잠자리가 차갑네그려.
공기가 변하여 시절 바뀐 것을 알겠고
잠을 이루지 못하니 밤이 긴 걸 알겠구나.
그렇게 잠을 못 이루고 전전반측하다가
중국의 최대 배달앱 ‘메이퇀(美團)’에 관하여
지난 12일에 대부분의 언론이 일제히 보도한 내용을 다시 찾아보았다.
메이퇀(美團)’의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 왕싱(王興)이 아래 당시(唐詩)를 인용하여
시진핑 주석을 진시황에 비유했다가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것이다.
회사가 당국의 경고를 받은 데 이어 주가가 폭락하여 시가총액이 약 30조 원 증발했으며,
그가 '제2의 마윈’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고 한다.
문제의 시는 이렇다.
焚書坑(분서갱)
章碣(장갈. 837-?)
竹帛煙銷帝業虛(죽백연소제업허)
關河空銷祖龍居(관하공소조룡거)
坑灰未冷山東亂(갱회미랭산동란)
劉項元來不讀書(유항원래부독서)
책 태우는 연기가 사라지며 진시황의 업적도 스러지고
함곡관과 황하만이 부질없이 황궁을 지키누나.
구덩이의 재가 채 식기도 전에 산동에서 난이 일어났네
유방도 항우도 본디 책을 읽지 않았거늘
이 시는 고대 중국의 진시황 말기에 있었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비판한 것으로서,
아무리 사상통제를 했어도 뜻밖에 유방과 항우 같이 책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일으킨 봉기는 막을 수 없었다고 꼬집고 있다.
모택동의 문화혁명 시기에
소위 불온서적을 불태우고 지식인을 핍박한 역사가 있는 중국 공산당에게는
반체제 시로 인식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시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가 어찌 중국만의 일이겠는가.
위헌시비가 일고 있는 대북전단금지법은 어떠며,
강남 부자 잡는다고 부동산값과 세금을 왕창 올린 결과는 어떤가.
통제만능주의로 간다고 과연 통제가 되는가.
진시황은 나라의 안위를 위하여 사상을 통제한답시고 책을 불태우고 유생들을 구덩이에 매장했지만,
정작 책과는 담쌓고 살던 유방과 항우가 봉기하여 진나라가 망하지 않았던가.
봇물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터지게 마련이다.
자정이 가까워지니 개구리 울음소리도 잦아든다.
그렇지만 설늙은이 얼어 죽게 하는 냉기는 여전하다.
모쪼록 건강에 유의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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