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가 된 염치
2021.06.27 01:08
닷새 전이 하지(夏至)였다. 한마디로 여름에 다다랐다는 이야기다. 그에 맞추어 온 산하가 짙은 푸르름으로 물들었다. 산은 청산(靑山)이고, 물은 녹수(綠水)이다. 그 청산, 그 녹수 모두 이 나라 이 강산의 보금자리이다. 선남선녀가 그 안에서 숨 쉬고 그 안에서 노닌다. 따라서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내줄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자산이요 보물이다.
황진이의 표현을 빌리면, 청산은 내 뜻이고, 녹수는 님의 정이다. 그 녹수가 흘러가도 청산은 안 변한다. 그러기에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소리내 울면서 흘러간다.
어제가 6월 25일.
71년 전 바로 그날 이 청산, 이 녹수를 포연 속에서 피로 물들인 전쟁이 일어났다. 이 나라 전체를 공산화하겠다는 허황된 망념에 사로잡힌 김일성이 3.8선을 넘어 남침을 개시한 것이다. 그 전쟁으로 온 국토가 폐허가 되었지만, 우리는 피땀 흘려 복구를 했고, 청산과 녹수를 되찾았다. 그리고 세계 속의 대한민국이 되었다.
동족상잔 비극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한 악의 집단 수괴는 죽은 후 화탕지옥에 떨어져 그 죄의 대가를 치르고 있으리라. 21세기에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막장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는 3대 세습의 김씨 왕국이 몰락하는 날, 이 청산, 이 녹수에는 자유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통일의 꽃이 피어날 것이다. .
그나저나 세파의 성쇠와는 상관없이 청산과 녹수는 여연(如然)하다. 옛시인의 말대로 ‘말없는 청산이요 태(態) 없는 유수’이다. 그래서 그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이다. 그에 맞추어 ‘산절로 수절로이니 산수간에 나도 절로’이면 좋으련만, 속인(俗人)의 삶이 어디 그런가.
본디 그러지 못하니 애써 그러려고 기를 써보지만, 마음 따로 몸 따로이다.
하릴없이 시집을 들추다 길재(吉再. 1353∼1419)의 시 ‘술지(述志)’에서 손길이 멎었다.
臨溪茅屋獨閑居(임계모옥독한거)
月白風淸興有餘(월백풍청흥유여)
外客不來山鳥語(외객불래산조어)
移床竹塢臥看書(이상죽오와간서)
개울가의 초가집에서 한가롭게 홀로 사노라니
달은 밝고 바람은 맑아 흥이 절로 넘쳐난다.
찾아오는 사람은 없어도 산새들이 노래하는지라
대나무 언덕으로 평상을 옮기고 누워 글을 읽는다.
참으로 멋진 정경이다.
녹수 옆에 초가집을 짓고 사는데,
어디서 산새 소리가 들려오니까 그 소리 따라 청산에 들어가 글을 읽는다니...
신선이 따로 없다.
더구나 달도 밝고 바람마저 시원하니 금상첨화이다.
너나없이 이처럼 욕심 안 내고 ‘절로’ 살면 실로 좋으련만, 염량세태는 정반대인 것이 안타깝다.
도하 각 언론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법무부가 하필이면 6월 25일에 역대 최대 규모의 검찰 인사를 하면서,
현 정권의 주요 불법 혐의(‘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불법 출국금지’ 사건과 ‘청와대 기획사정 의혹’, ‘월성 원전 경제성 평가 조작 의혹’, ‘이스타항공 횡령·배임' 등)를 수사하던 부장검사 전원을 교체하였다고 한다.
지난 5월에 친정권 검사의 대표 격인 김오수를 검찰총장에 임명한 데 이어, 이번 인사로 마침내 정권 말기 ‘방탄 검찰’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권 핵심이 관여한 의혹이 있는 사건들을 수사하던 검사들은 인사 원칙을 무시하고 모두 다른 곳으로 보내고, 그 대신 징계를 하거나 보직 해임을 함이 마땅한 친정권 검사들은 오히려 영전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법무부 장관은 이런 인사를 오히려 ‘나름 공정한 인사’라고 자평하고 있다고 언론은 전한다.
족제비도 낯짝이 있다는 속담이 있다.
머리통이 아무리 작은 족제비도 얼굴이 있듯이, 사람이면 당연히 염치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숨쉬기가 답답해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지하철 안에서 백팩을 앞으로 메고,
옆자리의 사람과 닿을까 다리를 모으고 앉는 것은
공동체의 안전과 평화, 그리고 번영을 위한 최소한의 염치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그게 바로 이 나라, 이 강산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최소한의 도리다.
염치는 체면을 차릴 줄 알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그것은 최소한 양심에 찔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 마음이다.
코로나19의 세계적인 대유행 속에서 우리나라가 이만큼 버텨내는 것도
갖가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방역수칙을 준수하는 대부분 국민의 염치 덕분이다.
그런데 법무부 장관은 이런 ‘염치’라는 말의 존재를 알까?
하긴 어디 현 법무부장관뿐이랴. 그에 앞서서 법무부 장관을 했던 사람들은 또 어떤가?
더구나 그중 한 사람은 차기 대통령 선거에 출마까지 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같은 진영의 사람들조차 당혹해한다고 언론은 전한다.
이제 이 땅에서 염치는 ‘미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인가.
최재형 감사원장이 사퇴하고 대선 출마를 선언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시중에 파다하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모든 면에서 타에 모범이 되는 그 훌륭한 분이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궁금하다.
어느 신문은 바로 김오수 검찰총장 임명 등 위와 같은 검찰 인사가 결정적인 이유라고 보도하고 있다.
이념이 나라를 망치고 있어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개 촌부 주제에 보도의 진부는 알 길이 없고, 다만 최 원장 같은 고결한 분마저도 구국의 결단을 해야 하게끔 유도하는 나라 꼴이 참으로 안타깝고 걱정스럽다.
온갖 모리배들의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진흙탕 정치판으로 뛰어 들어가려는 분을 위한 충정에서 야심한 삼경(三更)에 옛시조 한 수를 되뇌어 본다. 구국의 결단이 좋은 결실을 맺기를 바라면서.
가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가마귀 흰빛을 새올세라
청강에 이껏 씻은 몸 더러일까 하노라.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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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로가 자기 뜻을 펼치기 요원하다고 봅니다.
가마귀 떼를 싹 멸종시켜야하는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