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아니 즐거우랴

2022.03.26 22:28

우민거사 조회 수:237

 

닷새 전에 춘분(春分)이 지나고 열흘 후면 청명(淸明)이

봄을 재촉하는 비가 밤새 내렸다

아니, 봄은 이미 와 있으니

봄을 재촉하는 것이 아니라 봄의 전령인 봄꽃을 재촉하는 비라고 함이 더 적절할 듯하다.

지난 겨울에 워낙 가물었던지라, 작금에 내리는 비는 그야말로 단비이다

대지를 촉촉이 적셔주고만물을 소생케 하니어찌 아니 반가운가.

 

비가 그친 뒤 울 안으로 나서니

담장 앞 매화나무의 비를 머금은 꽃봉오리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하다. 

옛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옥각매화개욕편(屋角梅花開欲遍집 모퉁이의 매화가 막 피어나려 하고)이요

수지함우향인경(數枝含雨向人傾잔가지 비를 머금은 채 나를 향해 기우누나)이다. 

 

그런가 하면

간이분수대에서 솟아나는 물줄기에는 청량한 힘이 실려 있다

 

이윽고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니, 

금당천의 버들이 바야흐로 연두색으로 옷을 갈아입는 중이다.

 

20220326_082727.jpg

[매화나무의 비를 머금은 꽃봉오리

 

20220326_082728.jpg

[간이분수대]

 

20220326_080145.jpg

[금당천의 버드나무]

 

어린 시절 놀던 곳을 철이 들어 다시 찾는 것이 즐거움의 하나요

(幼年之所游歷 壯而到則一樂也),

궁핍한 시절에 지내던 곳을 뜻을 성취한 뒤에 다시 찾는 것도 즐거움의 하나요

(窮約之所經過 得意而至則一樂也),

외롭게 홀로 거닐던 곳을 반가운 손님, 좋은 벗과 함께 다시 찾는 것 또한 즐거움의 하나이다

(孤行獨往之地 携嘉賓挈好友而至則一樂也).

 

다산(茶山정약용(丁若鏞선생이 운길산 수종사에 놀러 갔던 이야기를 쓴 

유수종사기(游水鍾寺記)”의 첫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비록 반가운 손님, 좋은 벗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촌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을 이순(耳順)을 진즉에 넘긴 나이에 다시 걷는 즐거움이야말로 

금당천변에서 보내는 삶이 가져다주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봄날 비가 온 뒤의 청명한 하늘 아래서이니 금상첨화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대처(大處)의 한복판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낸 사람만 아니라면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하건만

많은 현대인들에게는 그저 남의 이야기로만 들리니,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방하착(放下着)이라고 했던가

욕심을 내려놓으면 되련만....

 

20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박빙의 차이로 승부가 갈린 끝에 지난 3월 9일에 막을 내렸다

5월 10일이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공약을 확실하게 지킨 구(정권이 물러나고

뒤이어 새 정부가 들어선다

 

앞으로 불과 한 달 보름밖에 남지 않았으니

그 기간에 신구(新舊정권 사이의 인수인계가 원만하게 이루어져야

나랏일이 제대로 돌아갈 터인데

언론을 통해 들려오는 것은 온통 삐걱거리는 소리뿐이다

국민은 안중에 없고 권력자의 주변에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위정자(僞政者)들의 낯 뜨거운 이해관계 때문일까

 

다산 선생의 글을 다시 읽어본다.

 

어린 시절 놀던 곳을 철이 들어 다시 찾는 것이 즐거움의 하나요,

궁핍한 시절에 지내던 곳을 뜻을 성취한 뒤에 다시 찾는 것도 즐거움의 하나요,

외롭게 홀로 거닐던 곳을 반가운 손님 좋은 벗과 함께 다시 찾는 것 또한 즐거움의 하나이다.

 

장강(長江)의 앞물결이 뒷물결에 의해 밀려나듯,

어차피 갈 사람은 가고올 사람은 오고,

그 온 사람도 때가 되면 역시 가는 게 세상사이다.

가는 사람이 욕심을 다 내려놓고 말없이 떠나는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일 때, 

그가 그동안 무슨 일을 했든지간에

그를 떠나보내는 사람은 연민의 정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러니 이왕 가는 마당이라면

그것도 소싯적에 품었던 입신양명(立身揚名)의 뜻을 충분히 성취한 마당이라면

이제는 그냥 다 내려놓고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는 곳으로 미련없이 돌아갈 일이다.  

그리하여 그곳으로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좋은 벗과 더불어 지낸다면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하랴.

 

아울러

가는 사람의 뒤를 이어 새로 오는 사람이,

혼주(昏主) 밑에서는 간신배들이 늘 설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임을 명심하여,

당리당략이나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실사구시의 자세로 국리민복을 위해 헌신한다면, 

이를 바라보는 국민 또한 어찌 아니 즐거우랴. 

 

이 모든 것을 소박하게 기대해 본다.

    

봄비(박인수).mp3

(박인수 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