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이 이러하니

2022.04.10 23:14

우민거사 조회 수:229

 

     조선 후기 정조 임금이 죽고 순조 임금이 즉위하던 해인 신유년(辛酉年. 1801)에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한 사건을 신유박해(辛酉迫害) 또는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 부른다.

이 신유박해는 당시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층의 종교탄압인 동시에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 등 집권 당시의 보수세력이 정치적 반대 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투쟁이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으로 18년간의 유배를 떠나게 된 게 바로 이 신유박해이다.

 

    당시 100여 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되었는데,

그 유배객 중에는 당시 벼슬아치도 아니고 천주교 신자도 아니었음에도 무려 24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 사람이 있다.

이학규(李學逵. 1770-1835)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가 자신의 호를 낙하생(落下生)이라고 지은 것도 이런 상황을 자조적으로 반영한 성격이 강하다.

 

      그는 김해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느낀 소회를 여러 형태의 글로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유배생활의 괴로움을 친구에게 편지로 쓴 글이 널리 알려져 있다.

     글은 수신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모씨에게(與某人)”라는 말로 시작되는데, 이는 나중에라도 유배당한 죄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는 이유로 친구가 혹시 탄압을 받을까 염려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각설(却說)하고,

이학규가 호소한 유배생활의 괴로움은 모두 네 가지이다. 이를 요약하면,

 

첫째, 집에서 오는 편지를 밤낮으로 기다리는 것인데, 부모와 처자식이 무탈한지 늘 걱정이라, 편지를 받으면 안절부절 못 하면서 그 속에 혹시 변고 소식이 들어있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소갈병(消渴病) 걸린 사람이 냉수를 찾듯 또 편지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둘째, 술을 마시지 않으면 목이 탈 뿐만 아니라 마음도 타들어 가는데, 돈이 없어 애를 태운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이웃의 자기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짚신 장수한테 돈을 꾸어 술을 마시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셋째, 이웃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걸핏하면 종이 한 장 들고 와 문상 글, 청혼 글, 금전 차용 글, 고소장 등 갖가지 글을 써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엉터리 글을 가지고 와 과거에 응시하려고 하니 강평과 수정을 부탁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넷째, 방이나 마당에서 툭하면 뱀이나 구렁이를 마주친다는 것이다.

 

이학규는 친구에게 위 네 가지 괴로움을 이야기한 후에 글의 끝머리에서,

 

, 안락하게 사는 사람들은 가시에 한 번 찔려도 괴롭다고 여기고, 파리가 한 번 핥아도 괴롭다고 합니다. 저만은 이 괴로움을 홀로 다 받고 구원해 줄 사람도 없고, 벗어날 방법도 없습니다

 

라고 하소연한다.

 

        19세기의 일을 작금의 잣대에 비추어 보면, 어느 하나 이런 게 실로 무슨 괴로움에 속하랴 싶다.

     가족의 안부야 편지를 기다릴 것도 없이 휴대폰으로 실시간 주고받고, 지척에 널린 편의점에 가면 값싼 소주, 맥주, 막걸리가 즐비하고, 각종 문서양식은 네이버에서 다 검색이 가능하고, 뱀이나 구렁이는 일부러 찾아도 보기 어려운 마당이다.

 

       그러나, 글쓴이도 언급하였다시피,

안락하게 사는 사람들은 가시에 한 번 찔려도 괴롭고, 파리가 한 번 핥아도 괴롭다고 하는 게 또한 세상사이다. 삶이 윤택하고 편안해질수록 극히 사소한 불편함에도 고통을 호소하기 마련이다.

 

        촌로(村老)는 사흘 전인 지난 목요일(2022. 4. 7.)에 코로나19(오미크론) 확진 판정을 받고, 격리를 위해 곧장 여주의 고향집 우거(寓居)로 내려왔다.

    이 코로나는 목이 아프고 열이 나는 게 가장 특징적인 증상이다. 병원에서 처방해 준 약을 계속 복용한 덕분에 사흘이 지나면서 다소 진정되긴 했으나, 여전히 몸이 불편하다. 무엇보다도 유배지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생활이라, 이동의 자유를 제한받는다는 게 힘들다.

 

         모처럼 일주일을 한가롭게 지낼 수 있어 오히려 감사해야 할 수도 있는데, 촌로의 마음은 결코 그렇지 않다

     비록 옛날의 낙하생(落下生) 선생이 호소한 괴로움 같은 것은 없을지라도, 자유와 안락함을 빼앗겼다는 박탈감이 가시에 한 번 찔린 것 이상의 고통으로 다가온다. 평소에 주말이면 늘 내려와 지내던 곳에 와 머물고 있음에도 말이다.

 

        덕분에 울안의 만개한 수양벚꽃을 함박웃음으로 대하고, 갓 피어나는 튤립과 수선화에 눈을 맞추는 뜻밖의 호사를 누리지만, 편대를 지어 창공을 가르는 금당천 오리떼가 마냥 부러운 이 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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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일까.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아래 시조 한 수가 가슴에 와닿는다.

 

    시절도 저러하니 인사(人事)도 이러하다

    이러하거니 어이 저러 아니하리

    이렇다 저렇다 하니 한숨겨워 하노라.

 

03 트랙 3.mp3 (인드라 스님의 산티 산티 산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