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탄,  혼돈 그리고 고요(1) (남인도, 스리랑카)

 


     같은 아시아권에 있으면서도, 처(妻)와 작은아들(경준)을 비롯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나그네의 발길이 좀처럼 향하지 않았던 곳이 바로 인도이다. 타고난 역마살로 인하여 다리품을 팔며 멀리 아프리카와 남미까지 여러 차례 넘나들도록 이제껏 인도행을 미루고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그곳이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도 쉽게 갈 수 있다는 생각이 잠재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가 바뀌고 경자년(庚子年)이 되어 촌부(村夫)도 어느덧 지공선사(地空禪師)의 반열에 들어서는지라 더이상 미룰 일이 아니던 차에, 그동안 북인도만 여러 번 가보았을 뿐인 처(妻)의 제의에 따라 남인도와 스리랑카를 찾아 길을 나섰다. 2020. 1. 8.의 일이다.

 

    이번 여행은 혜초여행사가 주관하는 문화·역사탐방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인데, 일행은 모두 19명(부부 6쌍 12명과 여자 7명)이다. 그중에는 방배동 경남아파트에 사시다가 재건축으로 인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신 문상흡 전 서울대 공대 교수님 부부도 계셨는데, 경남아파트 사실 때 촌부와 같은 동(棟)에 살고 동대표를 하셨다면서 우리 부부를 금방 알아보셨다. 세상이 넓은 것 같으면서도 좁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덕분에 이번 여행 내내 두 분이랑 즐겁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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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8.(인천공항 --> 델리)

 

   낮 12시 50분 인천공항에서 인도의 델리로 가는 대한항공 KE481편이 이륙을 시작했다. 당초 예정 시각보다 5분 늦은 출발이다. 지난여름 천산산맥 트레킹을 위해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를 갈 때 거의 1시간이나 지연 출발했던 것에 비하면 정시출발인 셈이다.

    8시간 50분 동안 4,767km를 비행하여 현지 시각(한국보다 3시간 30분 느리다) 저녁 6시 10분에 델리공항(정식 명칭은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 Indira Gandhi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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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 공항]

 

   규모가 방대한 공항을 나서자 영상 12도의 다소 쌀쌀한 날씨가 사방에서 울리는 요란한 경적소리와 함께 객을 맞는다. 인도 최대의 도시 델리(Delhi)는 대기질이 세계 최악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하늘에 먼지가 자욱했다. 숨 쉬고 사는 게 용하다 싶다. 


    대기 중이던 버스를 타고 공항 근처의 호텔로 이동했다. 호텔(Pride Hotel)에 도착하여 객실에서 밖을 내다보니 부근이 완전 호텔촌이다. 14억 인구가 사는 거대한 나라의 수도에 있는 공항이다 보니 그 이용객을 위한 숙박시설들이 인근에 몰려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 당장 우리 일행부터도 이곳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가 다음날 새벽에 다시 공항으로 나가 남인도의 첸나이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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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도와 스리랑카 여행 개념도]

 

2020. 1. 9. (델리-->첸나이-->마말라푸람)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남인도의 첸나이로 이동하는 날이다.
   비행기 시간에 맞추기 위해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났다. 한국 시각으로는 아침 8시인지라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된 상태에서는 이른 시각이 아니다. 해외여행 때마다 시차 문제로 애를 먹는데, 이렇게 덕(?)을 볼 때도 있다. 


   5시 30분에 아침식사를 위해 호텔 식당으로 갔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 빵 몇 가지만 있을 뿐이다. 식욕도 있을 리가 없어 허기만 면할 정도로 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6시 30분에 호텔을 나서 공항으로 출발했다.

   비행기 일정 등 자세한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델리 관광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잠만 자고 떠날 요량이라면 델리공항에 도착하여 바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첸나이로 이동하는 편이 훨씬 좋지 않을까 모르겠다. 그리 하면 적어도 새벽 4시 30분부터 설치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델리공항에서 첸나이행 비행기를 타기 위한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되어 일석이조가 아닐는지...

 

   국내선 비행기의 수하물 무게를 15Kg으로 제한(초과하면 Kg당 5달러를 내야 한다고 하는데, 다소 융통성이 있다)하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X-레이 검색대를 통과하려면 양말까지 벗어야 하는 것은 뭔가, 국제선도 아닌 국내선 비행기를 타는데 이 정도면 국제선은 어떠할까. 그렇다고 절차가 신속·친절하게 진행되는 것도 아니고, 가뜩이나 공해로 찌든 델리의 인상만 구기고 말았다. 

 

   아무튼 아침 8시 30분 발 비행기를 타고 11시에 첸나이(Chennai)에 도착했다. 비행시간만 보아도 인도가 땅덩어리가 확실히 큰 나라임은 분명하다.  첸나이공항은 델리공항에 비해 한결 깨끗하다.

   짐을 찾아 공항을 나서니 후끈한 열기가 얼굴을 덮친다. 그래도 첸나이의 도심은 델리에 비하여 공기가 훨씬 좋고 덜 붐빈다. 물론 이후 남인도의 가는 도시마다 다 그랬듯이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엉켜 울려대는 경적소리가 요란했지만, 그래도 델리보다는 양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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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나이 공항]  


   첸나이가 속해 있는 남인도의 타밀나두주(州)는 일찍이 드라비다인들이 문화의 요람을 이룬 곳이다. 드라비다인들이 처음 언제, 어디에서 이곳으로 왔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게 없지만, 초기 인더스 문명에서 갈라져 나와 BC 1500년경에 남쪽으로 내려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BC 300년경 이 지역의 동부는 촐라왕조, 중부는 판드야왕조, 서부는 체라 왕조로 나뉘었다고 한다. 

 

   타밀나두주의 주도이자 남인도의 최대도시(인도 전체로는 네 번째로 크다)인 첸나이에는 현대자동차 공장이 있다. 인도의 동남쪽 해안도시이고 현대자동차 공장이 있다 보니 ‘인도의 울산’이라는 현지 가이드 트리샨트(Trishant)의 말이 쉽게 이해된다. 그래서일까, 현대와 기아의 로고를 단 차들이 거리에서 많이 보였다. 트리샨트는 충남대학교에 유학을 왔었다는데 우리말을 유창하게 할 뿐만 아니라 유머와 재주가 넘쳤다. 

 

   첸나이에 도착하여 대기 중이던 버스(이후 인도에서 지내는 동안 내내 이 버스를 탔다)를 타고 먼저 점심 식사를 하러 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바야흐로 인도의 향식료를 접하는 순간이다. 각종 꼬치구이(재료는 닭고기, 생선등 육류와 버섯, 양파 등 채소)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Barbeque Nation)에 갔는데, 찍어 먹는 향식료가 매웠지만, 다행히 큰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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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beque Nation 식당]
   
   점심 식사 후 마리나 해변(Marina Beach)으로 갔다. 이 해변은 세계에서 가장 긴 해변의 하나로 백사장의 평균 너비가 300m(최장은 437m)에 이른다. 한겨울임에도 29도의 더운 날씨에 작열하는 태양 아래 고운 모래가 깔린 해변이 나그네의 발길을 바닷가로 유인한다. 길게 이어지는 백사장의 한쪽으로는 고깃배들이 늘어서 있다. 밤이 되면 고기를 잡으러 나가 새벽에 돌아온다고 한다. 바닷가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데 파도가 밀려와 신발을 신은 발이 잠겼다. 더운 날씨 때문인가, 물이 따뜻했다.
   그나저나 밀려오는 파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물속으로 가고 있는 저 반라(半裸)의 여인은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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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나 해변]

 

    마리나 해변에서 나와 인근에 있는 성 토마스 성당(St. Thomas Cathedral Basilica)으로 갔다. 1세기에 예수님의 제자 중 한 명인 토마스가 인도에서 선교하다가 순교하였는데, 1504년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그 무덤 위에 성당을 세웠고, 1893년에 영국인들이 네오고딕 양식으로 재건축한 것이 지금의 성당 모습이다.

    ‘인도’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힌두교이고 그 사원이 전국에 걸쳐 무수히 많이 있는데, 그런 나라에 이런 성당이 있다는 것이 놀랍고, 남인도의 힌두교 문화를 탐방하러 나선 길에 첫 문화유적지가 이처럼 카톨릭 성당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성당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어야 한다. 성당은 그나마 건물 안에서만 신발을 벗지만, 후술하듯이 힌두교 사원(남인도)도, 불교 사원(스리랑카)도 들어가려면 마찬가지로 모두 신발을 벗어야 하는데, 아예 사원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난 마당에서부터 벗어야 하는 곳도 있다. 신의 영역을 그만큼 신성시하는 것이다.

 

    성당 구내의 한 흰색건물 전면 벽에 씌어 있는 “GURU YESU ILLAM”이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주 예수를 찬양하는 글귀라고 하는데, 우리말 ‘예수’에 해당하는 ‘YESU’라는 단어가 특히 이채롭다. 두 단어의 연관성이 못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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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도9.jpg [성 토마스 성당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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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RU YESU ILLAM]

 

    성 토마스 성당을 둘러보고 나오니 어느새 오후 3시가 넘었다. 이날의 종착지인 마말라푸람(Mamallapuram)으로 서둘러 출발했다. 왼쪽으로 벵골해를 옆에 두고 난 길을 따라 남행을 계속하여 오후 4시 30분 마말라푸람의 Four Points by Sheraton 호텔에 도착하였다(첸나이에서 마말라푸럼까지는 60km이다). 


    쉐라톤호텔에서 운영하는 이 호텔은 호텔이라기보다는 리조트의 개념에 더 가까운 곳이다. 넓은 부지에 숲이 우거지고 그 사이사이에 2층 건물을 지어 객실로 사용한다. 거기에 물이 하도 깨끗하여 들어가기가 꺼려질 정도의 옥외수영장이 딸려 있고, 수영객을 위한 긴 의자와 수건이 비치되어 있다. 한국의 리조트들과는 달리 객실이 많지 않다 보니 내방객이 적어 그야말로 조용한 휴양지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처럼 리조트에 가까운 호텔들은 그 후 스리랑카에서 계속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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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도12.jpg [Four Points by Sheraton 호텔]

 

   예정된 저녁식사 때까지 다소 시간 여유가 있어 수영을 즐겼다. 넓은 수영장에 수영객은 우리 일행 중 두 명에 촌부를 더하여 총 3명뿐이었다. 수온도 적절했다. 이후의 일정 중 다른 곳에서도 수영을 할 기회가 더 있었는데, 매번 이처럼 쾌적하게 즐길 수 있었다. 서울에서 떠나올 때 혹시나 해서 가져온 수영복이 제 값을 하는 순간이다. 이왕이면 수영모자와 물안경도 가져올 걸 하는 아쉬움이 뒤따르는 것은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은 인간 속성의 발로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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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의 야외수영장]

 

   이처럼 시설이 좋은 것에 비하여 뷔페식 식사는 별로였다. 각종 커리요리를 빼면 이렇다하게 먹을 만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더운 지방임에도 불구하고 신선한 과일을 접하기 힘들었는데, 이후 남인도에 머무르는 동안 내내 그랬다. 한국에서 즐기던 과일들이 그리워진다. 달고 시원한 수박, 사과, 배... 역시 신토불이(身土不二)이다.

 

2020. 1. 10.(마말라푸람-->폰디체리)

 

   아침 5시 30분이 기상시간인데 그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시차 적응을 위해 일부러 수면제를 먹고 잤건만 새벽 4시가 되니 잠이 깼다. 어쩔 수 없다. 시간이 해결할 일이다. 6시 30분에 아침 식사를 한 후, 하룻밤만 자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을 뒤로 하고 8시에 호텔을 나섰다. 오전에 마말라푸람의 유적들을 둘러볼 요량이다.

 

   마말라푸람(Mamallapuram. 마하발리푸람<Mahabalipuram>이라고도 한다. ‘위대한 전사의 도시’라는 뜻)은 고대 남인도를 지배했던 팔라바왕국(=향지국)의 최대 항구로 옛 해양실크로드의 거점이었다. 달마대사(그는 본래 팔라바왕국의 왕자였다)는 이곳에서 배를 타고 선불교를 전파하러 중국으로 갔고, 신라의 혜초스님도 이곳을 다녀갔다고 한다(이는 확실히 검증된 이야기는 아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혜초스님의 이름을 딴 혜초여행사를 통해 촌부는 이곳에 왔다. 우연인가, 필연인가.

 

   이후의 일정이 주로 힌두교 사원을 둘러보는 것인 만큼 힌두교의 신들에 관한 예비지식이 필요하다. 가이드 트리샨트가 들려준 것에 여행안내서나 인터넷에 소개된 것들을 종합해서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인도는 인구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나라인데, 그 인구보다 신(神)이 더 많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신이 많다. 철기 문화로 무장한 아리아인(Aryan)이 인도의 북부 지역을 장악한 후 인도에 정착하면서 적응하는 과정에서 오래전부터 인도에서 살아온 원주민인 드라비다인(Dravidian)의 문화에 오히려 동화되거나 적응이 되었다. 그렇게 아리아인의 베다 문명과 드라비다인의 인더스 문명이 서로 결합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신들이 탄생했다.


   인도인들은 그 많은 신들 중에서도 다른 신들의 근본 뿌리라고 할 브라흐마(Brahma. 창조의 신), 비슈누(Vishnu. 유지의 신), 시바(Siva. 파괴의 신)를 가장 중요한 신으로 꼽는다. 브라흐마와 비슈누는 베다 문명에서, 시바는 인더스 문명에서 시작된 신으로 각자 맡은 역할이 다르다.

 

   브라흐마(Brahma)는 힌두교의 최고신으로 우주를 창조한 신이다. 이 신은 연꽃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신화나 그림에서 주로 연꽃과 함께 그려진다. 사방을 볼 수 있는 네 개의 얼굴과 네 개의 팔이 있는 브라흐마는 사람들의 소망에 따라 3억 가지가 넘는 다양한 모습(이를 아바타<Avatar>, 즉 화신<化身>이라고 한다)으로 변신해서 나타난다.
   브라흐마는 초기 우주 창조 신화에서는 중요한 신으로 나타났지만, 6세기 이후에는 그에 대한 숭배가 점차 쇠퇴하여 오늘날에는 인도 내에 브라흐마를 모신 사원이 하나밖에 없을 정도이다. 창조주의 지위가 이리 약화된 이유는 일단 창조가 이루어지고 나면 그것의 성장과 유지 그리고 해체가 중요해져서 브라흐마의 중요성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슈누(Vishnu)는 브라흐마가 창조한 세상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신이다. 비슈누는 특히 세상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세상을 구원한다고 한다. 심지어 부처도 비슈누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취급된다.
   비슈누는 힌두교의 신들 가운데 가장 자비롭고 선한 신이다. 그런데, 브라흐마나 시바가 심지어는 악마들에게도 은총을 부여하는 것과는 달리 비슈누는 결코 악마들을 돕거나 은총을 주지는 않는다. 신화에 따르면 모든 악마들이 결국에는 비슈누에 의해 파괴되는데, 그의 세상 유지기능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시바(Siva)는 세상을 파괴하는 신이다. 브라흐마와 비슈누가 세상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일을 하는 것과 대조된다. 그래서 그림이나 성상을 만들 때 시바는 시체를 짓밟고 춤을 추는 등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새로운 건물을 세우려면 낡은 건물을 무너뜨려야 하듯이, 시바는 낡은 세계를 멸망시키는 파괴자인 동시에 새로운 세상을 재건하는 복합적인 존재이다.
  시바는 수미산(須彌山)으로 알려진 카일라스(Kailas) 산에 살며 '난디(Nandi)'라는 황소를 타고 다닌다. 이마 정중앙에는 빛으로 모든 것을 불태워버린다는 제3의 눈이 있다. 천상에서 내려온 갠지스강을 머리에 이고 있으며 손에는 삼지창을 쥐고 있다.

 

   브라흐마에 대한 숭배가 쇠퇴한 대신에 각광을 받은 신이 가네샤(Ganesa)이다. 그래서 지금은 비슈누, 시바, 가네샤가 힌두교 신의 인기 3인방이다.   남인도14-1.jpg 가네샤는 지혜와 재산의 신으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다.

 

    가네샤는 시바의 처 파르바티가 자기 몸의 때를 빚어서 만든 신으로, 처음에는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시바와 싸워 목이 잘려 죽었는데, 후에 시바가 코끼리의 머리를 붙여주어 다시 살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가네샤의 형상은 코끼리의 얼굴에 네 개의 팔이 있고 배가 크다.

 

   가네샤의 큰 머리에는 지혜가 가득하고, 큰 귀는 잘 듣고, 작은 입으로는 말을 적게 하고, 긴 코로는 많이 거두어들이고, 큰 배에는 많이 저장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니 상인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

    힌두교 사원 부근의 노점이나 기념품 상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코끼리 얼굴을 한 신상(神象)이 바로 가네샤이다. 
 
   이들 신 외에도 인드라(Indra. 전쟁의 신으로 신들의 왕), 두르가(Durga. 전쟁의 여신. 시바의 배우자인 파르바티<Parvati>의 화신으로 악신인 아수라<Asura>를 제압하는 신), 크리슈나(비슈누의 여덟 번째 화신으로 신성한 사랑의 상징이다) 등이 많이 알려져 있다. 

 

    고대 팔라바왕국의 유적이 산재해 있는 마말라푸람에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파이브 라타스(Five Rathas. 다섯 수레 사원)’라는 힌두교 사원이다. 아직 오전 9시가 안 된 이른 시각이라서 출입문이 잠겨 있고, 우리 일행 외에는 관광객도 없다. 덕분에 문을 열자마자 들어가서 여유있게 둘러볼 수 있었다. 


    라타(Ratha)는 ‘신이 타는 수레’라는 뜻이다. 파이브 라타스는 다섯 대의 수레가 열을 지어 지나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수레 하나하나가 각기 하나의 사원이다. 각 사원 옆에는 코끼리나 소 또는 사자가 실제 크기로 조각되어 있다. 그 동물들이 수레를 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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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이브 라타스 사원과 실물 크기의 코끼리 조각]

 

    사원의 외부와 내부에는 시바신, 비슈누신, 인드라신, 두르가신 등 각 사원이 모시는 힌두교의 신들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7세기에 세워진 이 거대한 석조사원은 놀랍게도 그 바닥을 포함하여 본래 하나의 커다란 화강암 바위였고, 그것을 깎아 다섯 개의 사원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고대 인도인들의 돌을 다룬 정교한 솜씨는 이후에도 곳곳에서 동방나그네를 감탄케 했다.   
     이 사원은 남인도 드라비다 건축의 원형으로 평가받는 소중한 유적이다. 19세기에 발굴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모래 속에 묻혀 있던 이 사원은 198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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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브 라타스 사원의 이모저모]

 

    파이브 라타스 사원의 토대가 된 거대한 바위의 앞은 지금은 평편한 육지이지만, 사원을 건축할 당시에는 본래 바다였다고 한다. 남인도 최대의 항구답게 바다를 지나는 배에서 잘 보이는 바위에 사원을 만든 것이다. 

 

    파이브 라타스 사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시바신을 주신(主神)으로 모신 ‘해안사원(Shore Temple)’이 있다. 바로 바닷가에 있어 사원 이름이 그렇게 불린다.

   파이브 라타스에서 이 사원으로 이동하는 길에 붉은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계속 무리 지어 지나갔다. 성지 순례에 나선 힌두교도들이라고 한다. 부모를 따라온 어린아이들도 있다. 맑은 하늘에 작열하는 태양으로 꽤나 더운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게 종교의 힘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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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순례 중인 인도인들]

 

   피라미드 형태를 한 이 해안사원은 파이브 라타스와 비슷하게 7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본래는 7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2개만 남아 있다(큰 것은 시바신, 작은 것은 비슈누신을 모신다). 사원 앞으로 넘실대는 파도가 치는 바다 밑에 나머지 사원들이 잠겨 있는 것이다. 지금도 하부가 물에 잠긴 바닷가 바위 하나에 문이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원이 바다에 잠겼음을 보여 주는 징표이다.

   파이브 라타스는 그 앞이 바다가 육지가 되었고, 해안사원은 육지가 바다가 되었다. 그게 자연의 힘이다. 사원 주위의 낮은 담장에는 온통 난디(Nandi)가 조각되어 있다. 


    이 사원 역시 하나의 거대한 화강암 바위를 깎아 만든 것이라 기단과 외벽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화강암의 바위를 어떻게 이리도 정교하게 깎아 조각할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하다. 198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바닷바람에 나날이 마모되고 있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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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도21.jpg [해안사원의 이모저모]

 

   해안사원이 있는 바닷가에서 마말라푸람의 도심으로 20분 정도 걸어가면 유명한 '아르주나의 고행상(Arjuna's Penance)'이 나온다.

    폭 27m, 높이 15m의 커다란 바위에 마하바라타(Mahabharata. 인도의 신화를 엮은 서사시)의 주인공 아르주나가 고행하는 모습을 비롯하여 신화 속의 이야기를 새겼고, 그 옆으로는 석굴사원도 조성하여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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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주나의 고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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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⓵아르주나가 히말라야 산속에서 한쪽 다리만 들고 단식하며 고행하는 모습
⓶시바신이 아르주나의 고행에 감동하여 그의 소원을 들어주는 모습. 시바신은 아끼는 무기인 삼지창을 아르주나에게 주었다.
⓷아르주나를 지키는 코끼리. 실물크기와 같다. 인도 최고의 아름다운 조각으로 꼽힌다.

⓸고양이가 아르주나의 흉내를 내 고행하는 모습. 아르주나는 갈비뼈가 앙상한데, 고양이는 배불뚝이이다.] 

 

    이 암벽 부조(浮彫)의 중앙부위의 안으로 움푹 들어간 부분은 비가 올 때 이곳으로 물이 흘러내리도록 되어 있는데, 이는 갠지스강을 상징한다. 이 부분에는 합장한 채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의 나가신(Naga神.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뱀으로 표현된 물의 神이다)이 조각되어 있고, 갠지스강의 양쪽 언덕을 상징하는 좌우 바위 표면에는 수많은 신, 사람, 동물들이 갠지스강을 향해서 모여드는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다. 


    천상계를 나타내는 암벽상반부에는 하늘에 있는 여러 신들과 압사라(Apsara, 춤추는 선녀)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고, 지상계를 나타내는 암벽하반부에는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며 수도하는 모습과 동물들이 평화롭게 사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아르주나의 고행상 바로 옆으로 난 출입문을 지나 공원 안으로 들어가면 가네샤 사원(Ganesa Temple. 이 또한 커다란 바위를 깎아 만들었으며, 이 사원도 드라비다 건축양식의 원형으로 평가받는다)을 지나 천연기념물인 크리슈나 버터볼(Krishna’s Butter Ball)이 나온다. 


   바위 언덕의 미끄러운 경사면에 너비 5m, 높이 6m, 무게 250톤 되는 거대한 둥근 바위가 1,300년 동안 굴러내리지 않고 있다. 설악산 흔들바위는 평편한 곳에 있기라도 한데, 이 바위는 경사면에서 버티고 있는 게 신기하다. 안전을 고려해 1908년에 코끼리 7마리를 동원해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이 큰 바위 밑에서는 더위에 지친 개 몇 마리가 잠들어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인도 사람들이 비슈누신의 여덜 번째 화신인 크리슈나신(Krishna)에게 버터를 바쳤는데, 그 버터가 동그랗게 떨어진 것이 마치 버터볼 같다고 해서 ‘크리슈나 버터볼’로 명명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정작 이곳에 있는 안내판에는 이 바위가 크리슈나 신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씌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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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샤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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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슈나 버터볼]

 

   크리슈나 버터볼을 끝으로 마말라푸람의 유적 탐방을 마치고 전날 묵었던 Four Points by Sheraton 호텔로 돌아오니 오전 11시이다. 다소 이른 시각이긴 했지만 호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12시에 폰디체리(Pondicherry. 약 250년 동안 프랑스 식민지였기 때문에 ‘퐁디셰리’라고도 한다)를 향해 출발했다. 목적지는 폰디체리 교외에 있는 오로빌(Auroville)이다. 마말라푸람으로부터 대략 2시간 걸린다.

 

    오후 2시에 오로빌에 도착했다. 지난해 여름 송광사 불일암에 들렀다가 주지 덕조스님으로부터 오로빌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그런 곳이 다 있구나’ 하는 정도였지, 촌부가 그곳을 가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는데, 뜻밖에 그곳에 온 것이다. 참으로 세상일은 모르겠다.

 

    오로빌은 공동체 마을이다. 한마디로 자본주의적인 삶으로부터 벗어나 이상적인 인간의 삶을 살아보겠다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모여들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이다. 인도의 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스리 오로빈도(Sri Aurobindo, 1872-1950)가 구상하고 그의 영적인 파트너인 프랑스 출신의 미라 알파사(Mira Alfassa. 1878-1973)가 구체화한 이 공동체는, 1968. 2. 28, 전 세계에 공식적으로 그 시작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1988년 인도 정부는 오로빌에 자치권을 부여하였다.

 

     이 공동체의 창시자인 미라 알파사가 꿈꾼 이상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어떤 나라도 영유권을 주장하지 못하는 곳이 지구상 어딘가에 있어야 한다. 시험에 합격하고 자격증과 지위를 얻기 위함이 아닌, 자신의 재능을 가꾸어 새로운 재능을 일구어내기 위한 교육을 이루고자 한다. 그림, 조각, 음악, 문학 등 모든 예술적 아름다움을 모두가 평등하게 누리고자 한다. 즐거움을 누릴 기회는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아니라 오직 개인이 즐길 수 있는 만큼 한정된다. 이곳에서 돈은 더이상 '군주'가 아니다. '사회적 지위'나 '부'보다는 '개인'이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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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빌의 전경: 자료사진]

 

    오로빌이라는 이름은 '동트는 새벽(프랑스어 aurore에서 따온 단어인 Auro)의 도시(ville)'라는 뜻이다. 오로빌의 면적은 넓이 25㎢이고, 인구는 2018년 1월 기준으로 54개국에서 온 2,814명이다(남자 1,413명, 여자 1,401명). 그중 한국인은 35명(현재는 33명).

 

    오로빌이 처음부터 살기 좋은 동네는 아니었다. 황무지 사막이었던 척박한 땅에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물을 옮겨 땅을 가꾸고 나무를 심어 숲으로 키워냈다. 그렇게 해서 풀 한 포기 살아남기 힘든 황무지를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여러모로 현실적 제약이 많기 때문에 국제 사회의 지원으로 유지되는 측면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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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로빌 입구의 입간판]

 

     오로빌 입구의 안내소 앞 입간판에는 여러 나라 글자로 환영인사가 씌어 있는데 한글이 여섯 번째로 등장한다. 정녕 세계 속의 한국이다.

     이곳을 지나 숲속으로 난 황톳길을 30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평화정원(Matrimandir Peace Garden)이 나오고 그곳에 오로빌의 중심이라고 할 명상센터(정식 명칭은 Matrimandir Meditation Center)가 보인다. 이곳으로부터 공동체의 나머지 부분이 뻗어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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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센터]

 

    명상센터는 마치 영적인 깨달음의 상징처럼 땅 위로 솟아오르는 듯한 금빛 골프공의 모양이다. 금빛이 나는 것은 표면을 덮은 스테인리스 스틸 원판에 금박을 입혔기 때문이다. 내부에는 명상실이 있고, 지붕에 있는 반사장치를 통하여 들어온 햇빛이 바닥에 설치된 크리스털에 닿아 내부를 밝힌다. 전기 등의 인공조명시설은 따로 없다.

   우주의 기가 모여 응축되는 곳이라서 이곳에서 명상과 기도를 하면 영성을 얻는다고 하는 말을 믿어야 하나 모르겠다. 

    명상센터는 적어도 하루 전에는 미리 신청해야 안에 들어갈 수 있는데, 우리 일행은 다른 일정상 먼발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오로빌 입구에서 이곳까지 왕복하는 황톳길에 인도의 국수(國樹)인 반얀트리가 한 그루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 나무는 언뜻 보면 늘어진 굵은 가지를 여러 개 기둥들로 받쳐놓은 것처럼 보이지만(우리나라에서 오래된 소나무의 늘어진 가지를 기둥으로 받친 형태). 실제로는 굵은 가지에서 뻗어내린 얇은 가지들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이 커져서 줄기처럼 된 것이다. 이 넓은 세상에 무엇은 없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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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얀트리]

 

    조용한 마을 오로빌에서 나와 폰티체리 시내로 들어가자 다시 인도 본연의 모습이 기다린다. 자동차, 오토바이, 릭샤(Rickshaw. 소형 엔진을 장착한 세 바퀴 택시), 자전거, 사람이 얽히고설킨 가운데 자동차마다 뿜어대는 요란한 경적소리가 나그네의 귀를 먹먹하게 하고 혼을 빼놓는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명상을 하고, 명상을 하느라 요가가 발달하였다는 가이드의 우스갯소리가 그럴듯하게 들리겠는가.

 

    이렇듯 혼을 빼놓는 도심 한복판에 스리 오로빈도 아슈람(Sri Aurobindo Ashram)이 있다. 스리 오로빈도와 미라 알파사가 1926년에 설립한 힌두교 수양지이다. ‘아슈람’은 힌두교 수양지를 일컫는 말이다.
    인도에 있는 많은 아슈람 중 특히 유명한 이 아슈람은 명성에 비해 다소 초라했다. 안에 들어가려면 신발과 모자를 벗어야 한다. 휴대품 검사도 한다. 안에서는 침묵을 지켜야 하고 사진 촬영도 금지되어 있다. 건물 안의 뜰에는 스리 오로빈도와 미라 알파사의 무덤이 있는데, 그 곁에서 기도하는 참배객들이 줄지어 있다. 그런가하면 땅바닥에 앉아 명상에 잠긴 사람들도 적잖이 있었다.
    가이드가 촌부더러 앉아서 명상을 해도 된다고 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내부의 서점에서 요가에 관한 책을 한 권 사서 나오는 것으로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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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 오로빈도 아슈람]

 

    스리 오로빈도 아슈람을 둘러본 후 비교적 이른 시각인 오후 4시 20분에 폰디체리 시내에 있는 Shenbaga 호텔에 도착했다. 이 호텔은 이번 여행 중 이용한 호텔 중 가장 평범한 호텔이다.

    아직 시차 적응도 덜 된 데다 더운 날씨에 아침 일찍부터 이곳저곳 다닌 까닭에 다소 피곤하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더운 물로 샤워를 하고 잠시 쉬다가 6시 30분에 호텔 로비로 갔다. 외부로 나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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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nbaga 호텔]

 

     가이드가 해안가에 있는 근사한 프랑스 식당에서 맛있는 만찬을 즐길 것이라고 해서 그곳으로 가는 걸음걸이가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폰티체리의 어둠이 깔린 바닷가에 접해 있는 전면에 ‘Promenade’라는 상호가 적힌 그럴싸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 순간 그 기대가 최고조에 달했다. “오호, 깨끗하고 분위기 있고 멋지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비프스테이크와 생선요리(촌부와 집사람이 각기 달리 주문했다)가 우선 둘 다 너무 짰다. 그리고 차라리 찹스테이크라고 하는 것이 맞을 비프스테이크는 고기가 너무 질겼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게 세상살이 아니던가. 소를 신성시하는 인도에서 웬일로 비프스테이크를 먹나 했더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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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menade 식당]

 

     저녁 만찬에서 실망한 기분은 식후 바닷가를 걸으면서 사라졌다. 마침 보름달(전날이 음력 12월 보름이었다)이 휘영청 떠 있는 하늘 아래 벵골해의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고 있었다. 낮에는 30도를 웃돌며 나그네를 지치게 하던 더위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산책하기 딱 좋게 선선하게 부는 바람이 파도와 함께 객을 맞는다.
     그런 바닷가를 어찌 멀리서 온 관광객만이 즐기랴. 인도와 차도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나와 폰디체리 해변의 밤을 즐기고 있었다.

 

   바닷가로 난 길을 걷다 보면, 주위에 세운 열주(列柱)의 조명이 시시각각 바뀌는 한가운데에 동상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바로 마하트마 간디의 동상이다. 그에 대한 인도인의 애정이야 새삼 말할 것도 없다.
   그런가 하면 해변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서는 ‘삼총사’, ‘몬테크리스토 백작’ 등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가 머물렀다는 ‘뒤마의 거리(Rue Dumas)’도 지나게 된다. 이 거리에는 ‘Dumas Guest House’라는 숙박시설도 있다.

    폰디체리가 한때 프랑스 식민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뒤마의 거리’가 충분히 있을 법도 한데, 정말로 그가 이곳에 머물렀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아무려면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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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이 뜬 폰디체리의 해변]

 

   만찬과 산책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니 밤 9시다. 다소 이른 시각이지만 피곤이 잠을 재촉한다. 하긴 한국 시간으로는 밤 12시 30분이다.

 

2010. 1. 11. (폰디체리-->트리치-->마두라이)

 

   촌부 딴에는 수면제를 먹고 푹 잤다고 생각했는데, 예정된 기상시각 6시보다 한 시간 일찍 잠이 깼다. 어쩔 수 없다. 2009년 9월 대법원을 나온 이후 세계 곳곳을 트레킹 또는 관광차 다녔는데, 날이 갈수록 시차 적응이 더뎌지고 있음을 느낀다. 마음은 아직 청춘이라고 아무리 외쳐본들 진행되는 육체의 노화를 어찌하겠는가.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은데...

 

   아침 7시에 식사를 하고 8시에 호텔을 나섰다. 목적지 트리치(Trichy)까지는 버스로 4시간 30분을 가야 한다. 첸나이부터 시작하여 마말라푸람, 폰티체리는 모두 해안도시였는데, 이제부터는 남인도의 내륙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폰티체리에서 트리치로 가려면 38번 고속도로를 타야 한다. 그런데 이 고속도로가 재미있다. 우선 고속도로에 횡담보도가 있다. 그런가 하면 오토바이도 다니고 심지어 자전거도 보인다. 당연히 무단횡단하는 사람도 눈에 들어온다. 휴게소는 따로 없고, 필요하면 길가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용변을 보면 된다. 


   가이드에게 지금 우리가 가는 이 길이 정녕 고속도로 맞냐고 물으니까 맞단다. 그래도 미심쩍어하는 촌부의 의문을 해소시켜 주려는 듯 통행료를 징수하는 톨게이트가 나타났다. 정말 고속돌 맞네!   
   하긴 네팔의 카트만두에서 샤브루베시를 향해 가는 길은 비포장도로임에도 하이웨이(High Way)라고 하지 않았던가. 굳이 한국의 고속도로 개념을 인도에 대입할 일이 아니다. 그러니 다음날 칸야쿠마리로 가는 고속도로를 소 떼가 행진하며 지나간 것도 이곳에서는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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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보도가 있는 38번 고속도로] 

 

   트리치에 도착하니 배가 고프다. 아뿔싸 어느덧 오후 1시가 다 되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점심식사를 하러 들른 상암호텔(Sangam Hotel)은 나무가 우거진 정원이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운 정원만큼이나 식사가 좋았다. 인도에 와서 이때까지 중 가장 풍성한 뷔페음식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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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am 호텔]

 

    트리치(Trichy)는 타밀나두주에서 4번째로 큰 도시로 코베리강(Cauvery River)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도시의 정식 이름은 티루치라팔리(Tiruchirapalli)인데, 흔히 '티루치(Tiruchi)' '트리치(Trichy)'로 더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유서 깊은 유적이 많은바,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인도 최대의 힌두교 사원인 스리랑감 사원(Srirangam Temple. 정식 명칭은 Sri Ranganathaswamy Temple)이다. 그리고 거대한 바위 위에 세워진 록 포트 사원(Rock Fort Temple)이 또한 유명하다. 상업중심지이자 교통의 요지이기도 한 트리치에는 국제공항도 있다.

 

   13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 세워진 스리랑감 사원은 코베리강(江) 안의 섬에 있는 힌두교 사원으로 비슈누신을 모시고 있다. 장방형의 이 사원은 7겹의 위벽(圍壁)으로 둘러싸여 있어(가장 바깥 외벽의 길이가 남북으로 878m, 동서로 755m에 이른다). 외부에서 사원의 안쪽으로 들어가려면 그 위벽들을 통과해야 한다.

    4번째 위벽 안이 사원의 본래 중심부이고, 그 바깥 부분(4번째 위벽과 7번째 위벽 사이)은 후대에 추가된 것으로 힌두교 사제들과 사원 관리인들의 주거, 그리고 각종 상점들이 있어 거리가 활기에 넘치고 수많은 순례자들로 매우 번화하다.

    이 사원은 단순한 종교의식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부수적으로 시민들의 집회, 교육, 음악 및 무용 등의 활동을 수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사원의 위벽에는 고푸람(gopuram)이라고 불리는 문이 세워져 있다. 고푸람은 드라비다인들이 남긴 남인도 특유의 높은 탑문(塔門)이다. 고푸람의 ‘고’는 소(牛)를 의미한다. 고푸람의 전체 모습은 남인도의 소를 형상화한 것이다.

    고푸람의 기단은 견고한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그 위로 사다리꼴 모양의 탑신은 벽돌로 쌓아 올렸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벽체에는 힌두교의 3만 3천 신과 악마, 동물, 신화 속 등장인물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이들 조각은 점토 등으로 만들었고, 천연 소재 염료를 사용하여 화려하게 채색을 하였다. 채색은 대략 20년 주기로 다시 한다고 한다. 

 

  이런 고푸람이 스리랑감 사원에는 모두 21개 있고, 가장 높은 것은 최남단에 있는 것으로서 그 높이가 72m나 된다. 이 거대하고 화려한 고푸람들, 그리고 사원으로 끝없이 몰려드는 순례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인도인들에게 힌두교 신들의 존재가 갖는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얼마나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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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리랑감 사원의 항공사진과 지도]
 
    오후 2시 20분, 사원 인근에서 하차하여 이 사원 최남단의 고푸람으로 가는 길은 인파로 가득 차 걷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러다 첫 번째 고푸람을 대하는 순간 입이 벌어졌다. 그 웅장한 규모며, 화려한 조각들이라니... 주위의 번잡한 환경들 때문에 다소 빛이 바래긴 했지만,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예술작품 그 자체였다. 필설로 설명이 잘 안 된다. 그냥 가서 보는 수밖에 없다. 이런 것이 비로 종교의 힘인가 보다.

    언제고 주변을 정화한다면 세계에 내놓는 관광명소가 될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시장바닥이나 다름없는 지금의 주변 환경이 너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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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감 사원의 최남단 고푸람]

 

    이 첫 번째 고푸람을 지나 네 번째 위벽에 있는 고푸람까지 통과해야 실질적으로 스리랑감 사원의 내부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려면 네 번째 고푸람 앞에서 신발을 벗어야 한다. 벗은 신발을 맡기는 곳이 고푸람 앞에 있다.

   그런데 정작 신발을 맡기는 사람들은 우리 일행 같은 외국 관광객들이고, 대부분의 인도인들은 그냥 고푸람 앞의 길에다 벗어 놓는다. 신발이라고 해야 낡은 슬리퍼 정도이기 때문에(그나마 안 신은 맨발의 사람들도 많다) 아무 데나 벗어 놓아도 괜찮은 모양이다. 모자도 벗어야 하는데, 모자는 맡길 필요는 없고 들고 다니면 된다.

 

   사원에서는 신발과 모자를 벗는 것이 신(神)에 대한 예의라고 한다. 이는 나중에 스리랑카의 불교사원도 마찬가지였다. 신(神)에 대한 예의를 차리는 것은 좋으나, 30도가 넘는 땡볕에 달구어진 시멘트 바닥을 걸으려니 발바닥이 불고기가 되는 기분이고, 사원을 돌아보고 나왔을 때는 발이 연탄장사의 그것처럼 까맣게 되어 있었다. 맨발로 활보하고 다녀도 될 만큼 청결하면 얼마나 좋으랴마는 아직은 그런 기대를 하기가 난망한 것 같다.    
 
   사원 안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는데, 가이드 트리샨트와 사전에 이야기가 된 듯 스리랑감 사원의 가이드가 안내하는 대로 한 건물의 한적한 옥상으로 올라가니 사원의 전경을 볼 수 있고, 무엇보다도 전후좌우로 여러 개의 크고 작은 멋진 고푸람들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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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감 사원의 고푸람들]

 

   옥상에서 내려와 동북쪽에 있는 천주홀(千柱Hall. Aayiram Kaal Mandapam)로 갔다. 천주홀은 약 1,000개(정확히는 953개)의 기둥이 서 있는 홀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후술하듯이 스리미낙시 사원에도 천주홀이 있다.

    기둥 간격은 사방 3m 정도이고, 높이는 3~6m(중심부로 들어갈수록 높아진다)이다. 기둥은 모두 하나의 돌로 만든 것이고, 옆면에 각종 조각이 되어 있다. 한 기둥에는 여자가 한 손으로는 남자의 성기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얼굴을 밀어내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어 보는 이의 웃음을 자아냈다. 

 

    천주홀에서 나와 동쪽 고푸람쪽으로 가다 보면 비슈누신을 모신 신전 앞을 지나게 된다. 이 신전의 문은 천국으로 가는 문인데, 내내 닫혀 있다가 1년에 한 번 연다. 마침 이날의 그날이라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아쉽게도 힌두교 신자만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 동방 나그네는 천국 문턱에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이 신전의 외벽에는 비슈누신을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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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문과 비슈누신을 상징하는 문양]

 

   천국의 문 앞을 지나자 엄청난 인파가 몰려 있는 광장이 나왔다. 마침 성지 순례 기간이어서 사람들이 더 몰린 것이라고 한다. 특히 비슈누 신상을 가마에 태워 옮기는 행렬이 지나가는 곳은 인산인해다. 4일 전에는 무려 200만 명이 왔다는 말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화려한 색깔의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여인들, 더운 날씨 탓에 웃통을 벗은 남자들, 건물 안의 그늘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 건물 벽 밑에서 손으로 밥을 먹는 사람들... 어찌 보면 하나의 축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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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의 인파]
 
   인파를 뚫고 앞으로 나가자 규모가 크지 않은 홀이 나왔는데, 그 전면에 늘어서 있는 8개의 돌기둥에 조각된 말들이 눈에 들어온다. 말들이 앞발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매우 정교하다. 17세기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서, 말을 탄 사람과 시종들, 그리고 신화적인 동물들이 말을 다루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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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주의 말 조각상]

 

   고푸람의 규모에 입이 벌어지고, 정교한 조각에 감탄하고, 수많은 인파에 질리다 사원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3시 40분이다. 1시간 20분을 사원 안에서 보냈건만 하도 볼거리가 많아 어안이 벙벙하다. 거리는 달리는 자동차들의 요란한 경적소리에 정신을 차려 새까만 발바닥부터 물휴지로 닦았다.

 

    다시 버스에 올라 찾은 곳은 록포트 사원(Rock Fort Temple)이다. 트리치의 북부에 우뚝 솟은 바위요새(Rock Fort)는 18세기 중기의 전장터였다. 그 요새의 83m에 달하는 거대한 노두(露頭) 위에 사원이 자리 잡고 있다. 정상까지 417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역시 신발을 벗어야 한다. 계단의 일부는 바위 속에 동굴을 뚫어 만들었다. 이 바위 속 동굴에도 사원이 있다. 힘들여 오른 정상의 사원 내부는 아쉽게도 힌두교도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30도가 넘는 더위가 위세를 부리는 시내와 달리 이곳 정상은 시원한 데다 트리치를 파노라마로 조망할 수 있어 순례자와 관광객들로 붐빈다. 순례객 중에는 생후 4개월 된 아기를 안고 온 젊은 여인도 있었다. 생후 4개월 된 이 아기가 이날 제일 어린 순례객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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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속에 만든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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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속에 동굴을 파고 만든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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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포트 정상의 사원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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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4개월 된 순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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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포트 정상에서 본 트리치 전경]

 

    록포트 사원에서 내려와 트리치와 작별하고 남쪽의 마두라이(Madurai)로 이동했다. 이미 오후 5시가 넘은 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석양빛이 차창에 물들더니 이내 사위가 어두워졌다. 2시간 45분 걸려 마두라이의 Courtyard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 깊었다. 


    매리어트 호텔의 체인인 이 호텔은 트리치의 호텔과는 달리 깨끗하고 정돈된 격식 있는 호텔이다. 거기에 걸맞게 식당의 먹거리도 풍성하다. 특히 신선한 과일(수박, 배, 망고, 바나나, 자두 등)을 즐길 수 있어 좋다. 덕분에 늦게 도착했음에도 만찬을 제대로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호텔 또한 흠이 있다. 2인 1실의 객실이 좁고 슬리퍼가 한 켤레뿐이었다. 침대도 크기가 작았다. 무엇보다 침대와 세면장 사이에 벽이 없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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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rtyard 호텔]  

 

2020. 1. 12.(마두라이-->칸야쿠마리)

 

   아침 6시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창 밖으로 멀리까지 이어지는 넓은 숲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온이 19도로 쾌적하다. 이 날은 오전에 관광 일정을 마치고 오후에는 인도의 남쪽 끝 칸야쿠마리로 장거리 이동을 해야 한다.


   호텔 식당에서 모처럼 입에 맞는 아침 식사를 하고(곁들인 홍차의 맛도 좋았다) 8시에 호텔을 나섰다. 마두라이에서 발길이 먼저 향한 곳은 스리미낙시 사원(Sri Meenakshi Temple)이다. 

 

    마두라이는 BC 3세기부터 AD 11세기까지 고대 남인도 판디아(Pandya) 왕조의 수도였던 곳으로, 일찍이 '동방의 아테네'로 불리고 '로마의 부가 여기로 다 빠져 나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고대 무역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오랜 세월 인도 고유의 힌두 문화를 고수해 와 타밀인들의 혼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기에, 지금도 골수 힌두인들은 마두라이를 힌두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여긴다. 그런 마두라이 힌두 문화의 상징이 바로 스리미낙시 사원이다. 스리랑감 사원이 힌두교 최대(最大)의 사원이라면, 스리미낙시 사원은 최고(最高)의 사원인 것이다.

 

    스리미낙시 사원은 2,500년 전에 처음 세워진 이후 쇠락을 거듭하다 17세기 나야크(Nayak) 왕조 때 현재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장방형(240mx260m)의 사원은 사방으로 높은 위벽(圍壁)이 빙 둘러 있고, 동·서·남·북쪽 중간에 서 있는 대형 고푸람을 비롯하여 전부 12개의 고푸람이 높이 솟아 있다. 그중 가장 큰 남쪽 고푸람은 높이가 48m이다. 평소에는 남쪽 고푸람은 사용하지 않고 주로 동쪽 고푸람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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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미낙시 사원의 전경. 자료사진]

 

    사원에 도착하여 먼저 남쪽 고푸람으로 갔다. 비록 통과는 못하지만 가장 큰 것이기에 볼 만했다. 전날 본 스리랑감 사원의 남쪽 고푸람보다 높이가 낮긴 했지만(60m) 탑신의 조각들은 더 화려했다. 전날에 이어 다시 한 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조각의 화려함과 뒷받침이 된 종교의 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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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미낙시 사원의 남쪽 고푸람]

 

   남쪽 고푸람을 사진에 남기고 동쪽으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왜 그리도 걸인들이 많은지 의아하다. 인도에 와서 이따금 걸인들을 보긴 했지만 이곳은 유독 걸인이 많았다. 그중에는 어린 아기를 안고 구걸하는 젊은 여인들도 있다. 불쌍하다고 동전 하나라도 건네주는 순간 주위 다른 걸인들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기 때문에 못 본 척 지나칠 수밖에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동쪽 고푸람을 통해 사원 안으로 들어가려니 절차가 복잡하다. 우선 신을 벗어 맨발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다른 사원들과 마찬가지이다. 민소매나 반바지 차림도 안 된다. 그런데 이곳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휴대품 검사를 하고, 카메라, 휴대폰 등 전자제품은 맡겨야 한다. 게다가 공항처럼 몸수색도 한다. 힌두교 최고의 사원이라는 자부심의 발로인가, 아님 다른 사연이 있나.... 


   나중에 알고 보니 사원 안에서 불이 난 적이 있는데, 한 관광객이 그 장면을 촬영해 유튜브(You Tube)에 올렸다고 한다. 그 후로 이처럼 까다로워졌다는 것이다. 불이 안 나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일이지 일체의 촬영을 못 하게 하다니. 본말이 한참 전도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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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미낙시 사원 배치도 : ⓐ시바 신전(순다레스와라 신전). ⓑ미낙시 신전. ⓒ황금연지. ⓓ천주홀]

 

   고푸람을 지나 사원 안으로 들어가면 회랑에 죽 늘어선 기둥과 그 기둥에 새겨진 갖가지 모습의 조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스리랑감 사원에서도 보았던 천주홀(千柱 Hall. 정확히는 985개이다)이다. 돌기둥에 새겨진 조각은 전부 다른데, 특히 관능적인 여성과 우람한 동물들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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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홀. 자료사진]

 

    미낙시신과 시바신(정식 명칭은 시바신의 화신인 순다레스와라<Sundareswara>신. 이하의 스리미낙시 사원에 관한 서술 부분에서 시바신은 이 순다레스와라신을 의미한다)을 모신 신전에는 힌두교도만 들어갈 수 있는 까닭에 외국 관광객들은 이들 신전을 둘러싼 회랑과 기둥 및 황금연못(Ghat)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시바신의 아들인 가네샤신은 별도의 신전을 만들지 않고 회랑의 한켠에 신상(神像)만 만들어 놓았다. 그 앞에서 연신 예배를 올리는 힌두교인들을 볼 수 있다.
 
    이 사원의 주인공인 미낙시신은 '풍요를 상징하는 물고기의 눈을 가진 여신'을 뜻한다. 본래 드라비다인의 토착신이었는데, 후대에 힌두교의 시바신과 결합하여 시바의 부인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두 신의 결혼에 얽힌 신화가 흥미롭다.

 

   고대 마두라이에 있던 판디아왕조의 2대 왕 판디아는 시바신을 위한 거대한 사원을 건축하기로 했다. 왕은 후손이 없어 시바신에게 기도를 올렸고, 시바신은 왕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어, 기도를 집전하는 사원의 불길에서 여자아이를 탄생시켜 주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괴이하게도 물고기 모양의 눈과 세 개의 젖가슴을 가지고 있었다. 물고기 모양의 눈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자연스럽게 ‘미낙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왕이 아이의 괴이한 모습에 걱정하고 지내던 어느 날, 한 예언자가 나타나 "이 아이는 자라나서 미래의 배우자인 시바신을 만나면 세 개의 젖가슴 중 가운데 젖가슴이 사라질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판디아 왕이 죽은 후 미낙시가 나라를 통치하게 되었고, 히말라야로 여행을 갔다가 카일라스산에서 시바신을 만났다. 시바신을 만나자마자 정말 그녀의 세 개의 젖가슴 중 가운데 젖가슴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에 미낙시는 시바신에게 저간의 사정을 말하고 청혼을 하였다. 시바신은 수행 중이라 일단 그녀를 돌려보내고 수행이 끝난 8년 후에 마두라이에 ‘순다레스와라’라는 화신(化身)으로 나타나 미낙시와 결혼했다.

 

   지금도 이 사원에서는 금슬이 좋기로 소문난 시바신과 미낙시신의 전설을 기려, 밤이 되면 시바 신상을 가마에 태워 미낙시신의 처소로 들여보내 합방시키고, 다음날 아침에 그 가마를 다시 시바신의 처소로 옮기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 나아가 마두라이의 축제 때는 매년 시바신과 미낙시신의 결혼식을 연출하여 두 신상을 태운 축제행렬이 시내 대로를 누빈다고 한다.

 

    사원 내부는 북적대는 인파와 각종 종교의식, 코를 찌르는 향내, 황금빛 기둥, 기도 소리로 가득하다. 벽과 기둥에는 수많은 조각들이 형형색색의 자태를 뽐내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면 셀 수 없이 많은 벽화들에 눈알이 핑핑 돈다. 

 

   회랑에 소 한 마리가 넓은 공간을 버젓이 차지하고 있었다. 사람은 신(神)에 대한 예의로 모자와 신발을 벗고 경건함을 나타내야 하건만, 회랑 안에서 대소변을 자유롭게 배설하는 이 소는 아마도 신(神)과 동격(同格)인 모양이다. 이를 한낱 동방의 국외자에 불과한 나그네가 어찌 이해할 수 있으랴. 누군가 말했다. 


   “스리미낙시 사원은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냥 와서 보고 느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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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기둥(상), 순다레스와라신과 미낙시신의 결혼식 장면(하).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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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랑의 소. 자료사진]

 

   사원 안에는 황금연지(黃金蓮池 Golden Lotus Tank)라 불리는 연못이 하나 있다. 이 연못은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역할을 한다. 연못 중앙에는 황금 기둥이 우뚝 솟아 있고, 연못 뒤로는 고푸람이 우뚝 솟아 있다. 연못의 물에 비치는 기둥과 고푸람의 모습이 한폭의 그림이다.

   연못의 계단에 앉아 명상에 잠기면 이 사원의 주인인 미낙시신과 시바신을 접신(接神)할 수 있지 않을까. 명상이 아닌 망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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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연지. 자료사진]

 

   한 시간 넘게 스리미낙스 사원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이 사원이 말해주듯 종교가 삶의 일부로 녹아들어 있는 마두라이는 타밀나두주 제2의 도시(첸나이 다음으로 크다)답게 거리에 활기가 넘쳐난다. 버스, 승용차, 트럭, 오토바이, 릭샤(바퀴가 세 개인 소형차)가 연신 울려대는 경적소리에 더하여 소가 끄는 수레, 맨발의 순례자들, 걸인들이 되범벅이 된 거리는 사람들의 홍수를 이룬다. 이런 것을 보고 생동감이 있다고 해야 하나, 혼돈의 극치라고 해야 하나,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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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두라이의 거리모습]

 

  스리미낙시 사원에 이어서 찾은 곳은 티루말라이 나야크(Thirumalai Hayak) 궁전이다. 현재의 스리미낙시 사원을 건축한 것이 바로 티루말라이 나야크 왕(1623~1659)인데, 그가 이 궁전도 세운 것이다(1636년). 지금은 본래 규모의 20%만 남아 있다.

 

  오전 10시 45분, 이 궁전의 입구에 도착해서 처음 외모를 접했을 때는 다소 실망했다. 이제껏 보아온 사원들에 비하여 왕궁이 너무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궁전 안으로 들어서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드라비다 양식과 이슬람 양식이 융합된 궁전 건물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미끈하게 뻗은 열주들 위로 천국의 열쇠를 상징하는 이슬람식 아치를 얹은 모습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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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루말라이 나야크 궁전의 바깥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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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궁정을 가운데 두고 사면에 건물을 세운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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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비다 양식과 이슬람 양식이 융합된 건물 모습. 손동준 대리와 함께]

 

    궁전 중앙의 광장은 대관식 등 큰 의식을 거행하던 곳이라고 하는데, 마침 어떤 행사를 하려는지 의자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광장을 지나 궁전 본관으로 들어서자 넓은 중앙홀이 나왔는데, 한가운데 왕이 앉았던 황금의자가 놓여 있다. 고개를 높이 들어 천정을 바라보면 꽃무늬 비슷한 문양이 새겨진 둥근 지붕이 시선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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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 중앙홀과 왕금의자]

 

    이 홀을 지나 옆 건물로 들어서자 또 다른 홀이 나왔다. 이 홀은 특별회의실로 규모가 작은 의식을 거행하거나 연회를 베풀던 곳이라고 한다. 늘어선 기둥들의 하단부 붉은색과 상단부 및 천정의 흰색이 잘 어울린다. 바닥은 밑으로 파낸 형태인데, 필요시에 물을 채워 물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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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규모의 의식과 연회를 할 수 있는 홀]

 

  궁전을 둘러보고 나오다가 중앙현관 계단에서 일단의 인도 남자들(복장을 보니 순례객 같다)과 사진 촬영을 했다. 며칠 겪어 보니까 인도인들은 이방인들과 함께 어울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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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인들과 함께]
 
   사원과 궁전 관광을 마치고 12시에 Courtyard 호텔로 돌아와 점심 식사를 했다. 본래 뷔페식 식당이지만 이날 점심은 직원들이 일일이 가져다주었다. 덕분에 모처럼 여유있게 점심 식사를 하고, 다음 행선지인 칸야쿠마리(Kanyakumari)를 향해 출발했다.  

 

   마두라이에서 칸야쿠마리로 가는 고속도로 역시 앞서 본 고속도로처럼 횡단보도도 있고, 오토바이도 다닌다. 이것들은 빨리 달리고 싶은 관광버스에게는 천적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보다 더한 강적을 만났다. 고속도로의 한 차선을 차지하고 걸어가는 소 떼 행렬이 바로 그것이다. 하도 많아서 이루 셀 수 없는 소들을 몰고 목동들이 천연덕스럽게 가고 있었다. 인도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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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의 소 떼 행렬]

 

   마두라이에서 칸야쿠마리까지는 거리상으로 250km, 시간상으로 3시간 넘게 걸리는지라 중간에 도로변 휴게소에 들렀는데, 버스에서 내리자 후끈거리는 열기가 얼굴을 덮쳤다. 휴대폰이 알려주는 기온은 영상 31도, 체감온도는 34도란다. 목하 계절이 한겨울인데 이러면 여름은 어떨까. 모르긴 해도 끔찍하게 더울 것 같다.

 

    인도의 최남단에 있는 칸야쿠마리를 향해 얼마를 달렸을까, 문득 차창으로 풍력발전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우리나라 대관령 등지에 있는 것처럼 몇 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1980년대부터 설치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풍력발전기 단지의 면적이 1,600㎢나 된다. 차로 1시간을 달려도 발전기가 돌아가는 모습이 계속 보인다. 2016년 8월에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의 우루무치로 가는 길에 보았던 풍력발전단지를 연상케 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개인들도 이 풍력발전기에 투자하면 국가가 관리하고 연 10% 정도의 이익을 분배해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유심히 보면 풍력발전기들의 모습이 일정하지 않고, 발전기의 기둥에 회사 이름이 씌어 있는 것들이 적지 않다. 중국의 그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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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력발전단지]

 

   오후 5시에 칸야쿠마리에 도착했다. 이곳은 인도의 최남단에 있는 휴양도시로, 말하자면 땅끝마을이다. 아라비아해로 지는 일몰과 벵골해로 뜨는 일출을 다 볼 수 있어 관광객이 몰린다.

   아라비아해나 벵골해 모두 크게 보면 인도양에 속하는 바다인데, 이곳에서는 굳이 서쪽의 아라비아해와 동쪽의 벵골해, 그리고 남쪽의 인도양으로 세 바다가 만나는 곳이 바로 칸야쿠마리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 의미를 부여한 유적이 칸야쿠마리 사원, 비베카난다 기념관, 간디 만다팜으로 순례객과 관광객의 발길을 끌어 모은다. 

 

   칸야쿠마리에서 머문 숙소는 바닷가에 있는 Sparsa 리조트였는데, 오래전에 지었는지 시설이 매우 낡고 식사 또한 부실하기 짝이 없었지만, 정문을 나서면 바로 바닷가이고, 잘 가꾸어진 정원이 연출하는 아름다운 경치가 그런 부족함을 메워준다. 정원 건너로 지는 석양의 낙조며, 한밤중 야자수 위로 떠 있는 보름달의 풍경 하나하나가 예술이다. 

 

   판소리 단가 강상풍월(江上風月)에 나오는
“출문망(出門望) 출문망(出門望)은 월사오동(月斜梧桐)의 상상지(上上枝)라”
(문 밖에 나가 보름달이 오동나무 맨 꼭대기 가지 사이로 비스듬히 걸려 있는 것을 바라본다)
라는 대목 그대로이다.
단지 오동이 아니라 야자수일 따름이니 그게 대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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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rsa 리조트의 풍경]

 

  숙소에 짐을 풀고 잠시 쉬다가 아라비아해로 지는 해의 낙조를 보기 위해 바닷가로 나갔다. 바닷가에는 이미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한국에서도 이미 익히 보고 또 보았던 낙조이건만, 이날 아라비아해로 지는 해가 연출하는 낙조가 유난히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머나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온 나그네의 마음에 동심이 깃든 때문이리라. 이 순간은 촌부도, 집사람도 이제는 지공선사(地空禪師)의 반열에 들었음을 까맣게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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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야쿠마리 아라비아해의 낙조]

 

   낙조를 즐기며 바닷가를 한동안 산책하다 리조트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하고 비교적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시차가 적응되는 데 비례하여 피로가 조금씩 쌓여가는 데다 다음날 새벽에 인공위성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려면 일찍 일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2020. 1. 13.(칸야쿠마리-->코발람)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남인도에서는 새벽 5시 30분부터 6시 사이에 하늘에 인공위성들이 줄지어 지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호기심 천국의 촌부가 아닌지라 새벽 5시부터 서둘렀다.

    낮에는 영상 30도가 넘어가는 더운 날씨이지만, 이른 새벽에는 쌀쌀한지라 옷을 두둑하게 챙겨 입고 리조트 정원으로 나섰다. 아직 지지 않은 보름달이 휘영청 떠서 객을 반기는데, 인공위성은 나타날 생각을 안 한다. 6시가 되도록 정원을 서성이며 동서남북의 하늘을 목이 아프게 쳐다보았지만 허사였다.
 
    ‘잠이나 더 잘걸...’ 하다가 일출을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리조트 밖으로 나갔다. 이른 시각이라 조용할 줄 알았던 거리는 그게 아니었다.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열었거나 여는 중이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아니 이제 겨우 아침 6시밖에 안 되었는데... 그렇다, 인도인들이 그렇게 부지런한 줄은 미처 몰랐다. 그들의 상술이 대단하다는 이야기가 허언이 아님을 알겠다. 가네샤신을 중하게 섬기는 이유도.

 

    벵골만으로 뜨는 아침 해를 보려면 리조트에서 동쪽으로 20분 정도 부지런히 걸어가야 한다. 발걸음을 재촉하다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다름 아닌 길가에서 노숙하는 인도인들이다.

    노숙자야 서울에서도 흔히 볼 수 있으니 새삼스러울 일이 아니지만, 한 가족이 담요를 들치고 나오는 광경은 전혀 예상 밖의 광경이다. 두세 살 정도 되는 어린아이까지 전 가족이 길에서 담요 한 장 덮고 노숙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길가에 쭉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길가에 웬 공중화장실이 일정 간격으로 있나 궁금했었는데 그 이유를 알겠다.

 

    Sparsa 리조트의 시설이 낡았다고 투덜댔던 촌자의 푸념이 얼마나 사치스런 것이었던가. 얼마 안 되는데도 인도에서의 체류 기간이 늘어날수록 촌자의 머릿속은 복잡해져 가고 있었다.

   웃통을 벗어젖히고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은 또 왜 그리도 많은지. 아무리 보아도 쿠마리암만 사원에 들어가려고 웃통을 벗은 것 같지는 않다(육지에 있는 쿠마리암만 사원은 안에 들어가 쿠마리 신상을 보려면 웃옷을 벗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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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야쿠마리의 아침 거리모습]

 

    나중에 아침 식사 후 배를 타고 건너갈 작은 바위섬(비베카난다 바위섬)이 보이는 바닷가가 칸야쿠마리의 일출명소이다. 해가 뜨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이미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이 운집해 있다. 실크로드를 따라 서안에서 우루무치까지 중국 여행을 할 때도 그렇더니 인도도 웬만큼 알려진 곳은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다.

 

    이윽고 동쪽 하늘이 서서히 붉어지더니 아침 6시 47분 티루발루바르(Thiruvalluvar) 석상 옆으로 떠오르는 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다 위로 구름(해무<海霧>인지 정확히 분간이 안 된다)이 얕게 깔린 탓에 정작 해가 머리를 처음 내민 곳은 수면 위가 아니라 그 구름 위였다. 그래도 일출을 보기 위하여 모인 그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어제 진 해가 오늘 떠오르고 그 해가 지면 내일 다시 떠오르건만, 영겁의 세월을 두고 뜨고 지기를 되풀이하는 그 해를 보려고 어제도 오늘도 사람들은 모여들고 있다. 무엇이 그 사람들을 이렇게 불러 모으는 것일까. 멀리 동방에서 온 나그네조차 왜 아침잠을 거르면서까지 이곳에 와 있는 것일까. 도무지 모르겠다. 하긴 일찍이 장자가 갈파하지 않았던가.

 

“今者吾喪我 汝知之乎(금자오상아 여지지호.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네가 나를 알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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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도78.jpg [칸야쿠마리 벵골해의 일출과 인파]

 

    일출을 보고 부지런히 숙소로 돌아오니 다른 사람들은 다 아침식사를 끝냈는데, 집사람이 혼자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출 사진을 보여 주는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하고, 서둘러 식사를 마쳤다(전술한 것처럼 먹거리가 별로 없어 오래 식사할 것도 아니었다).

 

    아침 7시 30분, 버스를 타고 비베카난다 바위섬에 있는 쿠마리암만 사원을 보러 갔다. 일출을 보던 바닷가의 선착장에서 나룻배를 타고 바로 앞에 보이는 섬으로 건너가야 한다.

    선착장에 도착하니 이곳도 인도로 예외가 아닌지라 이미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아이고, 배를 타려면 부지하세월이겠네’ 하고 있는데, 가이드가 걱정마라며 회심의 미소와 함께 가리키는 곳에 세워진 안내판을 보고는 한시름 놓았다. 200루피(=3,400원 정도)에 특별승선권을 판다는 것이다. 일반승선권 가격의 4배이다. 그 표를 사니 과연 줄을 설 필요 없이 배를 탈 수 있었다.

   배의 자리가 좋으냐 나쁘냐가 아니라, 배를 빨리 탈 수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표값이 4배나 차이가 나는 이런 상황이 우리나라에서도 용인될까? 거 참, 정말 헷갈린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우리 일행이 탄 배는 아침 8시에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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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승선권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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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베카난다 바위섬을 오가는 나룻배]

 

    그나저나 바로 앞에 있는 섬으로 가는 나룻배이긴 하지만 명색이 바다를 건너는지라 구명조끼를 입어야 한다. 배가 계류 중인 선착장 바닥에 쌓아놓은 구명조끼를 무작위로 하나 집어 들어 입으려고 보니 기가 막힌다. 때가 까맣게 끼었다. 오죽하면 가이드가 자기는 이 배를 탈 때마다 헌 옷을 갈아입고 버린다고 할까. 그러면서 가능하면 구명조끼가 목의 생살에 안 닿게 후드가 달린 옷을 입으라고 권한다.

 

    그런데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강화도 외포리에서 석모도까지 배를 타고 가는 거리가 이곳과 거의 비슷한데, 그동안 석모도 가는 배를 타면서 구명조끼를 입어본 기억이 없는 것이다(지금은 연륙교가 놓여 배를 탈 일이 없다), 아무리 때가 꼈을망정 안 입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비베카난다 바위섬까지 배를 타고 건너는 시간은 10분 정도밖에 안 된다. 쿠마리암만 사원은 비베카난다 바위섬에도 있고, 선착장 부근의 육지 해안가에도 있다. 전자가 먼저 생기고, 후자는 섬에 왔다 갔다 하기가 불편하여 나중에 추가하여 더 만들었다고 한다.

   인도의 땅끝인 이곳의 지명 자체가 칸야쿠마리이고, 쿠마리암만 사원을 두 개나 만들 정도로 이곳에서 쿠마리의 존재는 절대적인 셈이다(‘칸야’는 ‘처녀’라는 뜻이고, ‘암만’은 ‘엄마’라는 뜻이다).  

 

   인도나 네팔에서 일반적으로 쿠마리는 예지능력을 가진 처녀신으로 한국의 무당과 유사한 존재이다. 이처럼 쿠마리는 본래 처녀다.

   시바신이 아니면 결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서약한 그녀는 시바신을 찾아 인도의 땅끝인 이곳까지 왔다, 더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까지 온 쿠마리는 이곳에서 죽어 여신이 되었고, 지금도 불멸과 불변을 상징하는 다이아몬드 코걸이를 한 채 육지에 있는 쿠마리암만 사원의 중심부에서 시바신을 기다리고 있다. 이 사원 안에 들어가려면 남자들은 웃통을 벗어야 하는지라 들어가지 않았다.
   반면 비베카난다 섬에 있는 쿠마리암만 사원에는 쿠마리가 시바신을 기다리며 서 있던 발자국이 남아 있는데, 이곳에서는 신발만 벗으면 된다. 사원의 모습이 이제껏 보아온 것들과는 달리 무슨 요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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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마리암만 사원. 위는 육지에 있는 것이고, 아래는 섬에 있는 것]

 

   쿠마리암만 사원이 있는 이 바위섬의 이름이 ‘비베카난다 바위섬(Vivekananda Rock)’이듯이 이 섬은 비베카난다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y Vivekananda. 1863-1902)는 인도의 성자(聖者) 라마크리슈나(Ramakrishna. 1836-1886)의 수제자이다. 


   그는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리는 세계종교회의에 힌두교 대표로 참석해야 했는데, 대회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뇌하였다.

   식민지 조국의 종교인으로 태어나, 기독교 문명의 수많은 침탈을 보고 겪은 정통 힌두교도이자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대회에 참석하러 가기에 앞서 1892.12.25.부터 27일까지 이 이곳 바위섬에서 수행하며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 시카고로 날아간다.

 

    종교회의의 다른 참석자들이 모두 자기 종교의 우월성을 강조할 때, 그는 ‘모든 종교는 결국 하나의 진리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주장을 펼쳤다. 이를 계기로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고, 아울러 힌두교를 세계에 알리는 첫 번째 계기가 되었다.

 

   그 비베카난다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1970년에 세워지기 시작하여 몇 차례 증개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마치 고대의 무슨 성 같기도 하고, 사원 같기도 한 외관이 눈길을 끄는데, 막상 내부에는 이방인의 눈에는 이렇다 할 볼거리가 별로 없었다.

    다만 독특한 문양이 전면에 새겨져 있는 명상관이 있어 인도인들 틈에 잠깐 앉아 보았다. 짧은 시간에 금방 명상에 잠기는 것은 촌부의 역량을 벗어나는 일이라 시늉만 내다 나왔다.
  동방의 촌부에게는 오히려 이 기념관을 오르내리는 계단에서 사진을 찍는 인도인들의 쾌활한 모습과 카리브해의 해적 같은 모습이 더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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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베카난다 기념관과 내부의 명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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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베카난다 기념관 계단에서 만난 인도인들]

 

   비베카난다 기념관과 쿠마리암만 사이에는 제법 넓은 광장이 있는데, 이곳에서 남쪽 바로 옆의 바위섬을 바라보면 거대한 석상이 눈에 들어온다. 칸야쿠마리 육지를 바라보고 있는 티루발루바르(Thiruvalluvar)의 석상이다. 높이가 무려 40.4m나 된다. 5,000여 명의 석공이 매달려 2000년에 완성했다고 한다.

 

   티루발루바르는 4세기 때의 인물로 고대 타밀의 시인이다. 타밀사람들은 지금도 그의 시를 애송한다고 한다. 시를 통해서 그는 가난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만이 유일한 선물임을 주장했다.

   그러고 보면 쿠마리 여신, 비베카난다, 티루발루바르, 그리고 후술하는 간디가 이곳 칸야쿠마리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는 셈인데, 극동지역에서 온 나그네에게는 기념사진의 배경이 되고 있을 뿐이다. 나그네가 공감의 장으로 들어가기에는 문화적 이질감이 너무 큰 걸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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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루발루바르 석상]

 

  비베카난다 섬에서 육지로 돌아가는 배는 그냥 선착순으로 탄다. 특별승선권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이른 시각에 갔다가 돌아가는 편이라서 그런지 오래 기다리지 않고 9시에 배에 오를 수 있었다.

 

    육지의 선착장에 돌아와 걸어서 인근의 칸야쿠마리 사원(앞서 기술한 것처럼 웃통을 벗어야 하는 내부로는 들어가지 않았다)을 지나 간디 만다팜(Gandhi Mandapam)으로 이동했다. 마하트마 간디가 1948년 암살을 당한 후 화장하고 남은 유골이 그를 애도하는 인도의 각지로 보내졌는바, 칸야쿠마리도 그중 한 곳이다. 벵골해와 아라비아해, 그리고 인도양이 한 곳에서 만나는 화합의 상징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간디의 유골은 이곳에서 잠시 보관하다 앞바다에 뿌려졌고, 1956년 그 보관장소였던 곳에 지은 기념관이 간디 만다팜이다. 이곳도 안으로 들어가려면 신을 벗어야 한다.

    내부에는 주로 간디의 생애를 다룬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고, 중앙홀에 간디의 유골함을 올려놓았던 제단이 자리하고 있다. 이 제단 위의 둥근 지붕 천정에는 작은 구멍이 하나 뚫려 있어 그곳으로 햇빛을 받아들이고 있다. 빗물은 안 들어 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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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만다팜과 내부의 간디 유골함 비치했던 제단]

 

    간디 만다팜을 끝으로 오전 일정을 다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아직 아침 10시다. 그런데 새벽 5시부터 설친 탓인가, 피로가 몰려온다. 간밤에 묵었던 객실에 가서 짐 정리를 하고 11시 30분까지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식당으로 가 점심 식사를 한 다음 12시 30분에 다시 버스에 올랐다.

     첸나이에서 칸야쿠마리까지의 남행길이 끝나고, 이제부터는 서인도의 해안을 따라 북행(정확히는 북서행)한다. 목적지는 코발람(Kovalam). 남인도 여행의 마지막 방문지이다.

 

    3시간 20분 걸려 오후 3시 50분에 코발람에 도착했다. 칸야쿠마리로로부터 거리상으로는 90Km 정도밖에 안 돼 그렇게 오래 걸릴 곳이 아닌데, 편도 1차선의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인해 오래 걸렸다. 도중에 길 양편으로 야자수가 많이 보이는 것이 이제까지와 다른 풍경이었다. 


   코발람은 세계적인 휴양 도시이다. 특히 코발람의 해안은 초승달을 닮은 해안선과 아라비아해에서 불어오는 순한 바람, 그리고 낙조가 아름다운 곳이다. 게다가 고급 리조트들이 들어서 있어 세계 각지로부터 관광객이 몰려든다. 일상에서 지친 투숙객의 지친 심신을 달래줄 깨끗한 수영장, 스파 등의 부대시설이 훌륭하다. 요가 강습을 하는 곳도 있다.
 
    바닷가 백사장 옆에 있는 숙소인 사무드라(Samudra) 리조트는 야자수 숲속에 있다고 할 정도로 정원에 야자수가 많다. 최고 높이가 3층인 이 리조트는 지은 지 오래된 것임에도 품격이 느껴진다. 이곳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니 영상 32도의 후끈한 열기가 객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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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드라 리조트와 바로 앞의 해변.  맨 아래 사진의 촌부 우측이 가이드 트리샨트]

 

    객실에 짐을 풀어놓고 정원 쪽으로 난 문을 여니 바로 앞이 수영장이다. 저녁 식사 때까지 자유시간이라 바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을 했다. 수영객이 몇 명 없는 널찍한 수영장이라 마음껏 여유를 부리며 늦은 오후의 뜨거운 열기를 식혔다.

 

    새벽부터 설친 데다 장시간 버스를 타고 온 탓에 쌓인 피로를 수영으로 푼 후에 리조트 근처 상가에 가서 인도 전통 모자를 하나 샀다(8달러). 인도에 와서 진즉부터 인도 전통 모자나 아니면 인도 로고가 새겨진 모자를 하나 구입해서 쓰고 싶었는데, 인도의 마지막 밤을 보내기 직전에야 겨우 하나 구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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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조트 안의 수영장] 

 

    리조트에서 자유시간을 보낸 후 바닷가에 있는 식당으로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메뉴는 바닷가재요리와 새우 커리. 인도에 온 이래 최고로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음식도 음식이려니와 바닷가에 놓인 테이블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아름다운 낙조를 감상하는 가운데 즐기는 만찬은 말 그대로 황홀했다. 이럴 때 배경음악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일까, 밀려오는 파도가 소리를 내며 생음악을 들려주었다.

   하필이면 인도를 떠나기 전날이 되어서야 이런 만찬 자리를 만들어 준 여행사 측에 투정 아닌 투정을 했다. 진즉에 좀 마련해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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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도95.jpg [문상흡 교수님 부부와 함께]

 

    이 코발람 해변은 해가 서서히 지는 모습도 멋지지만, 해가 다 져서 어둠이 깔린 후 고깃배들의 불빛이 연출하는 장면도 압권이다. 그 불빛이 마치 아라비아해에 인천대교를 건설해 놓은 듯하다.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노라 밤이 깊어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남인도의 마지막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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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도99-1.jpg [일몰 직후의 아라비아해]

 

2020. 1. 14.(코발람-->트리반드룸-->콜롬보)

 

    남인도를 떠나 스리랑카로 가는 날이다. 오전 10시에 떠나는 비행기 시간에 맞추기 위해 5시 30분에 일어났다. 서울에서도 그 시각이면 늘 일어나는 촌부와는 달리 집사람은 한참 꿈속을 헤맬 시각인데, 해외여행지에서는 별 어려움 없이 때맞춰 일어나는 것이 신기하다. 

 

    인도에서의 마지막 아침식사가 풍성하고 좋다. 마치 포도주를 디켄팅하듯이 커피를 타 주는 노(老) 직원의 마술 같은 솜씨가 눈길을 끈다. 고급 리조트의 값을 한다는 느낌이다. 해안에 밀려오는 파도소리마저 정겹게 들린다. 매사 생각하기 나름이다.

 

    식사를 마치고 7시 30분에 리조트를 나섰다. 국제공항이 있는 트리반드룸(Trivandrum)까지는 차로 20분 정도 걸린다. 전날 칸야쿠마리에서 온 길과는 달리 공항 가는 길은 왕복 4차선 도로로 차가 마음껏 달릴 수 있다.         
    트리반드룸 공항에서 가이드 트리샨트와 작별했다. 한국말도 능숙하고 갖가지 재능을 갖춘 데다 유머까지 풍부하여 앞으로도 한국에서 오는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끌 것 같다.

 

   공항 안은 썰렁했다. 아니, 사람이 거의 없다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다. 이제껏 어디를 가든 사람에 치여 애를 먹었는데 의외다. 아무리 시골 공항이라지만 명색이 국제공항인데... 국제공항을 표방하며 우리나라 곳곳에 생긴 시골 공항들이 오버랩된다. 그렇게 한적한 이 공항에서 난생처음 겪는 곤욕을 치를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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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반드룸 공항 내부]

 

   우선 사람이 줄을 서 있는 것도 아닌데 탑승권을 받는 데 30분이 걸렸다. 게다가 집사람과 함께 여권을 내고 짐을 부치고 했건만, 좌석이 19열과 22열로 떨어져 있는 탑승권을 내 준다. 콜롬보까지 비행시간이 40분밖에 안 되니 군말 않고 받았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양반이다.


   검색대에서 내용물을 검사한답시고 배낭을 다 뒤지는 데는 혀를 내둘렀다. 이제껏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X-레이 검색대를 통과한 배낭을 뒤지는 일은 처음 겪었다.

   고작해야 책자와 세면도구(칫솔, 치약, 소형 전기면도기 등), 그리고 전화기 충전용 배터리(이것은 더구나 위탁 수하물로 부치면 안 되고 휴대하고 타야 하는 것이다) 등밖에 없는데 무슨 난리를 치는 건지 모르겠다.

    심지어 전기면도기와 충전용 배터리는 다시 X-레이 검색대로 보내 재검사한다. 그뿐인가, 몸 검색대에서는 여권검사까지 하고, 탑승권에 확인 도장도 찍는다. 


   전 세계의 수많은 공항을 다녀보았지만 이런 공항은 처음이다. 그것도 권력이라고 완장을 찬 사람들의 횡포에 기가 질린다. 마치 외국 관광객들을 괴롭히려고 작정한 사람들 같다.
 
   촌부에게 인도는 정녕 끝까지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로 남는다. 그렇게 인도를 떠나 스리랑카로 향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