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탄, 혼돈 그리고 고요(2) (스리랑카)
2020.03.01 12:00
감탄, 혼돈 그리고 고요(2) (남인도, 스리랑카)
2020. 1. 14.(트리반드룸-->콜롬보-->담블라)
[스리랑카 여행 개념도]
오전 10시에 남인도의 트리반드룸을 떠난 비행기가 40분 만에 스리랑카의 콜롬보 공항(정식 명칭은 Bandaranaike International Airport. 콜롬보 도심으로부터 북쪽으로 30km 떨어져 있다)에 도착했다.
인도와 스리랑카가 40분 만에 갈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다 보니 두 나라는 여러 면에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14억 인구의 인도가 힌두교 국가인 데 비하여 2,200만 인구의 스리랑카는 불교 국가인 것은 무슨 연유일까. 한마디로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는 힌두교가 번성하면서 그 영향으로 8세기 중반부터 불교가 쇠퇴하였으나, 스리랑카에서는 계속하여 불교가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스리랑카는 불교국가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종교가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불교는 스리랑카의 원주민으로 국민의 대다수(74%)를 차지하는 싱할라족(Sinhalese)의 종교이다. 반면에 남인도에서 넘어온 소수민족(18%)인 타밀족(Tamils)은 대부분 힌두교도이다. 이러한 종족과 그에 따른 종교의 다름이 안타깝게도 스리랑카를 27년 동안 내전 상태로 몰아넣었다.
스리랑카는 면적이 한반도의 1/3에도 채 못 미친다. 대륙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인도에 비하면 그야말로 작은 나라인지라 ‘인도의 눈물’이라고 할 정도다, 이 작은 나라에 남인도의 티밀족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러 건너왔을까.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지리적인 위치상 스리랑카는 고대로부터 인도인들의 침략이 잦았고, 그러다 보니 인도 남부에 거주하는 타밀족들과 자연히 접촉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타밀족의 침략과 퇴각이 반복된 것일 뿐 그들이 뿌리내리고 산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제국주의시대 영국이 인도대륙 전체를 식민지화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영국인들은 스리랑카에서 대규모 농장(플란테이션)을 경영하기 위하여 남인도의 타밀인들을 대거 데려왔다.
영국의 식민지배로부터 인도와 스리랑카가 독립한 후, 스리랑카의 북부 지역에 몰려 살던 타밀인들은 1983년 6월 독립을 주장하며 폭동을 일으켰다. 그렇게 시작된 내전은 2009년 5월 공식 종료되기까지 26년 동안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 수십만 명의 부상자, 100만 명 이상의 난민을 발생시켰다.
오랜 내전으로 인해 국가 경제가 피폐해졌음은 물론, 인도와의 사이에서도 긴장관계가 이어졌다. 다행히 지금은 모든 것이 종료되어 치안도 좋고 인도와의 관계도 개선된 상태이지만, 내전으로 망가진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 가장 시급한 화두로 떠올라 있다.
우리 일행이 스리랑카를 여행하는 동안 안내를 맡은 현지 가이드 차미스(Chamith)의 말에 의하면, 스리랑카에서 사용하는 공산품은 다 수입품이라고 보면 된다고 할 정도이다. 봉제업과 차 산업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공장 하나 변변한 게 없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바람에 스리랑카는 공해가 없는 청정지역으로 남아 있다. 멀리 동방에서 온 촌자는 스리랑카에 머무르는 동안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파란 하늘이 부럽기 짝이 없었다.
콜롬보 공항은 규모가 우리나라의 지방공항 수준이다. 오랜 내전을 치른 나라치고는 입국절차도 까다롭지 않다. 그런데 그 공항의 입국장 벽에 씌어 있는 글귀가 자못 살벌하다.
“불법 약물을 소지하면 사형에 처한다(Possession of illegal drugs carries death penalty)”
는 것이다. 마약범죄라도 기승을 부리는 것일까.
[콜롬보 공항]
공항을 나서니 아직 오전인데도 30도의 후끈한 열기가 얼굴을 덮친다. 체감온도는 32도이다. 대기 중이던 버스(이후의 일정 내내 이 버스를 탔다)를 타고 30분 정도 걸려 Jetwing Blue 호텔에 도착했다.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서이다.
공항에서부터 시작하여 30분 동안 버스를 타고 호텔에 도착하기까지 남인도에서와는 너무나 다른(본래는 그게 정상이지만, 남인도를 다니는 동안 겪었던 것과 비교하면 분명 다른) 광경에 직면했다.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조용하다’는 것이다. 이제는 더이상 차와 툭툭(Tuk Tuk. 소형 엔진을 장착한 세 바퀴 택시. 인도의 릭샤에 해당한다)과 자전거와 사람이 얽혀서 계속 빵빵대는 경적소리를 듣지 않게 된 것이다. 따라서 혼이 나갈 일도 없다.
스리랑카에서는 길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쓰레기를 버리면 처벌을 받는다. 술을 팔려면 허가를 받아야 하고 그것도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만 팔 수 있다. 가이드로부터 이런 설명을 들으니 공항 입국장에 씌어 있던 살벌한 글귀가 이해가 된다.
야자수로 둘러싸인 Jetwing Blue 호텔은 바닷가에 있다. 단순한 바닷가가 아니라 넓은 백사장이 있는 해수욕장이 호텔에서 바로 이어진다. 식사 시작하기 전까지 다소 시간이 있어 그 백사장으로 나가 보았다. 햇볕이 뜨겁다. ‘작열(灼熱)한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쓰지 않을까. 그 뜨거움 아래에서도 서양인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바다에 가까운 백사장 위에 멋진 흰 돛단배 하나가 놓여 시선을 끈다. 호기심에 가까이 가니까 선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돈을 내면 바다로 끌고 나가 태워주겠다고 한다. 시간도 없으려니와 이제 겨우 스리랑카에 발을 디뎌 물정을 모르는 초행자가 탈 일은 아니어서 돌아섰다.
[Jetwing Blue 호텔 앞의 해수욕장]
호텔로 돌아오면서 보니까 호텔 야외수영장에도 서양인들이 썬탠(suntan)을 즐기고 있었다. 이후로도 스리랑카의 호텔(또는 리조트)에 딸린 야외수영장에서는 이런 서양인들을 자주 보게 된다. ‘인도양의 진주’로 불리는 스리랑카를 휴양지로 찾는 서양인들이 많다는 게 괜한 말이 아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호텔(또는 리조트)의 뷔페식당도 한결같이 정갈하고 먹거리가 풍성했다. 공업이 전무하다시피한 상태에서 관광업이 국가의 주된 수입원인 만큼 볼거리, 쉴거리, 먹거리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야자수로 둘러싸인 Jetwing Blue 호텔]
맛난 점심으로 배를 불리고 오후 1시 30분 호텔을 나섰다. 목적지는 콜롬보의 북동쪽에 있는 담블라. 스리랑카의 정중앙에 위치한 이곳은 콜롬보로부터 차로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담블라 가는 길을 포함하여 스리랑카의 길은 양옆으로 대개 야자수가 늘어서 있다. 야자수만으로 숲을 이룬 곳도 많다. 스리랑카 전체가 야자수로 덮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뜰 안에서 야자수를 키우는 집들도 적지 않은데, 집주인 마음대로 베지는 못한다고 한다. 연간 4모작이 가능하여 쌀농사가 발달하였지만, 야자도 주요 수입원이라고 한다.
목하 우리나라 등산로에 많이 깔려 있는 야자매트의 원료를 이곳에서 수입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도로변의 야자수 숲]
오후 5시 담블라에 있는 석굴사원에 도착했다. 담블라 석굴사원(Dambulla Cave Temple)은 BC 1세기에 란기리 바위산 중턱(해발 180m)에 조성된 것으로 스리랑카의 여러 석굴사원 중 가장 크면서 잘 보존된 곳이다.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불교 유적지 중 하나로, 1991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말 그대로의 석굴사원은 산 중턱에 있고, 사원 초입에 있는 주차장에 도착하여 경내로 들어서면 먼저 거대한 황금불상이 눈에 확 들어오는 황금사원(Golden Temple)이 나온다. 이 사원도 통칭 ‘담블라 석굴사원’의 일부인데, 산 중턱에 있는 진정한 석굴사원과 구분하여 따로 황금사원이라고 부른다.
[황금사원]
황금사원을 지나 경사진 길을 따라 15분 정도 위로 걸어 올라가야 진정한 석굴사원이 나온다. 올라가는 길은 시멘트계단이거나 시멘트와 돌로 포장하여 걷기에 별 어려움이 없다. 진정한 석굴사원의 경내로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어야 하고, 반바지나 민소매 옷도 안 된다. 이는 모든 스리랑카 사원에 다 해당하는 예법이다. 그래서 입구에 신을 맡기는 곳이 있다.
석굴사원은 본래는 그냥 평범한 석굴로 승려들의 수행처였다. 그런데 고대 스리랑카 왕국의 발라감바(Valagamba. BC 103~77) 왕 때의 일이다.
남인도 타밀족의 갑작스런 침공으로 수도 아누라다푸라가 점령당하자 왕은 승려들의 도움으로 수도로부터 남쪽으로 72Km 떨어진 이곳(1번 석굴)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14년 후에 수도를 탈환한 왕은 승려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자기가 피신하여 머물렀던 석굴에 불상을 조성하여 사원으로 만들고, 그 석굴 옆에 또 하나의 석굴(2번 석굴)을 크게 파서 역시 불상을 조성해 사원을 만들었다. 그 후 후대로 내려오면서 3,4,5번 석굴사원이 차례로 추가되었다.
그리하여 불상 153개, 스리랑카 왕의 동상 3개, 힌두교 신의 동상 4개, 2,050㎡(620평)의 프레스코 벽화 등이 5개의 석굴사원 안에 조성되었고, 다섯 개의 석굴사원은 복도를 통하여 서로 연결된다.
[석굴사원 전경]
1번 석굴은 ‘신왕<神王>의 석굴’(Deva Raja Lena)로 불린다. 안으로 들어서면 부처님의 거대한 열반상(길이 14.3m의 와불)이 눈에 들어온다. 하도 커서 고개를 좌우로 돌려야 한다.
이 열반상은 인간이 아니라 신(神)의 왕이 만들었다고 믿는 데서 동굴 이름도 ‘신왕의 석굴’로 불리는 것이다. 열반상의 발치에는 부처님의 열반을 슬퍼하는 아난존자상이 조성되어 있다. 그 옆에는 힌두교 신 비슈누의 상도 있다.
[1번 석굴의 열반상 와불]
2번 석굴은 ‘위대한 왕의 석굴(Maha Raja Lena)’이다. 담불라 석굴사원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석굴로, 60여 기의 신상이 있고, 벽과 천장은 수많은 문양의 프레스코화로 꽉 차 있다. 석굴 이름의 ‘위대한 왕’은 바로 이곳에 피신했다가 사원을 조성한 발라감바 왕을 말한다. 그래서 그의 입상이 세워져 있다.
이 석굴에 들어서면 부처님 큰 입상이 정면에서 객을 맞이한다. 그 외에 커다란 와불상이 있고, 그 주위에 보현보살(Saman), 미륵보살(Maitreya), 관세음보살(Avalokiteshvara)이 지키고 서 있다.
석굴 안 한가운데는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는 돌항아리가 놓여 있다. 어디서 흘러들어오는 물인지는 알 수 없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또는 폭우가 쏟아져도 물의 양이 늘 일정하다고 한다. 그야말로 신성한 감로수인 이 물은 사원의 중요한 의식 때 불전에 올리는 용도로 사용된다.
3번 석굴부터는 승려들의 수도 공간이다. 4번, 5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불상과 벽화들이 동굴 안을 장식한다. 부처님은 4번 석굴 중심에서는 가부좌를 틀고, 5번 석굴에서는 와불의 형태로 되어 있다. 이곳을 포함하여 스리랑카에서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와불을 자주 보게 된다.
오랫동안 바위에 굴을 파고 많은 불상을 조성하고 천장과 벽에 빼곡하게 불화를 그린 스리랑카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 일을 하였을까.
인도에서 힌두교 사원에 거대한 고푸람을 만든 것이나, 스리랑카에서 산 중턱의 바위에 굴을 파고 사원을 조성한 것이나 당시로서는 하나같이 실로 지난한 일이었을 텐데, 정녕 그들에겐 종교의 힘이 그리도 위대했던 것일까.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촌부에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마력의 작용으로 다가온다.
[담블라 석굴사원의 이모저모]
담블라 석굴사원을 둘러보고 나오니 어느덧 해가 서산으로 지고 있었다. 석굴사원이 산 중턱에 있는지라 일몰을 뚜렷하게 볼 수 있는데, 나뭇가지 사이로 석양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담블라 석굴사원에서 본 일몰]
담블라 석굴사원에서 이날의 숙소인 Jetwing Lake 호텔은 그리 멀지 않다. 저녁 6시 30분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밀림 속에 자리한 이 호텔, 음식도 풍성하고 맛이 좋지만, 무엇보다도 풍광이 참으로 멋진 곳이다.
2020. 1. 15.(담블라-->시기리야-->플론나루와-->담블라)
전날 강행군을 했지만 밀림 속에 있는 그야말로 청정지역의 호텔에서 푹 잔 덕분인지 아침 6시에 가뿐하게 일어났다. 아침 식사 전에 호텔 주위를 산책하러 나섰다. 낮에는 32도를 웃도는 더운 날씨지만. 이른 아침에는 19도 내외로 상큼하기 그지없다.
이슬 먹은 풀밭 위를 걷노라니 신과 바짓가랑이가 젖지만 그게 대수랴. 아니 그런 경험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대체 언제였던가, 가물가물한 기억을 떠올리며 작은 호숫가에 다다랐다. 순간 호수에 비친 산과 그 위로 떠오르는 해가 한양 촌자의 눈을 의심케 한다. 수묵화 그림인가, 현실인가?
이런 생각지도 않은 몽환적인 풍경을 대하는 것이야말로 여행이 주는 즐거움의 하나가 아닐까. 힘닿는 대로 다리품을 팔고 볼 일이다. 작년 9월에 구입한 갤럭시 S10 휴대폰의 카메라가 진가를 발휘했다.
[Jetwing Lake 호텔과 주위의 모습]
이곳 호텔에서 하루 더 묵을 예정이라 간단한 짐만 챙겨서 8시 10분에 길을 나섰다. 첫 목적지는 시기리야(Sigiriya)이다.
8시 45분에 버스에서 내려 세계 10대 불가사의에 속하는 시기리야의 경내로 들어서자 먼저 시기리야 박물관이 나오고, 여러 나라 언어로 박물관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한글로도 “박물관”이라고 씌어 있다. 세계 속의 한국이고, 한글이다(일본어는 없다).
[시기리야 박물관 안내판]
시기리야 박물관 안에는 무엇보다도 후술하는 미인도가 그대로 재현되어 있는 게 볼거리이다. 복제품이라 사진도 찍을 수 있다.
시기리야(Sigiriya. 또는 Sinhagiri)는 스리랑카 중부의 밀림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높이 약 180m(해발 370m) 정도의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 위에 만든 요새, 그리고 그 일대를 일컫는다. 시기리야는 ‘사자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시기리야 요새 전경, 자료사진]
지금 이곳을 찾는 우리는 세계 10대 불가사의라며 감탄을 하지만, 이곳은 슬픈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애환의 장소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남인도의 침략자 타밀족을 몰아내고 서기 455년에 싱할라 왕국의 왕으로 등극한 다투세나(Dhatusena)에게는 장남 카샤파(Kasyapa)와 차남 목갈라나(Moggallana)라는 아들이 있었다. 장남인 카샤파는 어머니가 평민 출신이었고, 차남 목갈라나는 어머니가 왕족 출신이었다. 때문에 왕위 계승에 위태로움을 느낀 장남 카샤파는 473년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카샤파는 아버지를 죽인 패륜으로 민심을 잃은 데다 쿠데타 때 인도로 도망간 이복동생 목갈라나가 언제 다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 이를 두려워하여 477년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를 떠나 거처를 시기리야로 옮긴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기리야에서 수행하고 있던 승려들을 내쫓고 성을 쌓고, 성 밖으로는 해자(동서 800m, 남북 500m)를 만들어 악어를 키우고, 성 안에는 '물의 정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 안의 중심에 있는 거대한 바위 꼭대기(면적 1,4ha)에 궁전과 각종 건물을 짓고, 심지어 바위를 파서 거대한 수조(수영장)를 만들었다. 한 마디로 공중궁궐을 만든 것이다.
바위의 중턱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돌로 사자상을 조성하고 그 목구멍(‘사자의 문’이라고 한다)으로 사람들이 다니는 통로를 만들었다. 지금은 사자의 두 앞발만 남아 있다. 이 바위 요새만 만드는 데만 11년 걸렸다고 한다. 거기에 동원되어 고초를 겪었을 백성들의 삶이 과연 어떠했을까.
이렇게 공을 들여 요새를 만들었지만, 서기 495년 인도에서 세력을 키운 이복동생 목갈라나가 돌아와 벌어진 전투에서 패한 카샤파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왕이 된 목갈라나는 이곳을 본래 주인이었던 승려들에게 돌려주었고, 이후 시기리야는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1898년 영국 식민지 시대에 발견되어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박물관에서 나와 성안(성벽은 소실되고 없다)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해자를 건넜다(건너는 다리가 있다). 악어를 키웠다고 하는데, 악어는 보이지 않고 물오리가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다.
해자를 건너 성안 구역으로 들어서자 좌우로 사각 또는 원형의 연못으로 조성된 ‘물의 정원(Water Garden)'이 계속 이어진다(물의 정원은 전체규모가 가로 700m, 세로 500m이다). 건기(乾期)에 사용할 물을 저장하던 곳이다. 그리고 요새를 구축한 바로 그 거대한 바위가 정면으로 보인다.
[해자]
[물의 정원]
촌부가 지금 서서 보고 있는 저 깎아지른 바위의 정상에 공중궁궐을 지었다는 게 쉽게 믿기지 않는다.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대가가 고작 저런 곳에 궁궐을 짓고 살아야 비로소 안심이 될 만큼 겁나는 일이었는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런 패륜을 저질렀단 말인가. 그리고 그 끝은 결국 자살로 이어졌다니 허망할 따름이다. 인간은 정녕 탐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어리석은 존재일까.
[정상에 공중궁궐이 있는 바위 요새]
이제 겨우 오전 10시인데, 바위 요새로 올라가는 계단(바위의 서쪽면에 있다)이 뜻밖에도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번에 스리랑카에서 여행하는 동안 유일하게 인파가 몰린 곳이다. 바위의 정상까지는 1,202개의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도 말이다. 외국인은 입장료가 비싼 반면, 스리랑카 국민은 입장료를 안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1,500년 전에 이런 곳에 기어이 계단을 설치하고 올라가 궁궐을 짓고 살았던 카샤파 왕이나, 그로부터 1,500년이 지난 지금 작열하는 태양을 아랑곳하지 않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허위허위 올라가는 장삼이사(張三李四)나 도긴개긴 아닐는지...
[계단을 오르는 인파]
바위의 중턱 전면(서쪽면)에는 바위를 깎아 만든 테라스가 있고, 바깥쪽으로 길이 140m의 '거울의 벽(Mirror Wall)'이 있다. 처음 만들었을 당시에는 벽이 거울 역할을 했다고 하나, 지금은 그냥 황토색 벽일 뿐이다. 거울의 벽 위쪽의 원통 속으로 난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면 18점의 미인도 벽화가 나온다. 여인들은 풍만한 젖가슴을 내놓은 관능적인 모습이다.
미인도는 카샤파 왕이 자기가 죽인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참회의 심정으로 제작한 것으로 본래는 500점 정도 되었다고 한다. 세월의 흐름에 따른 풍화작용 탓도 있지만, 나중에 시리기야를 돌려받은 승려들이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일부러 지워버렸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전술한 것처럼 박물관에 18점의 미인도가 재현되어 있다.
[테라스와 거울의 벽]
[미인도. 박물관에 재현되어 있는 것을 촬영했다]
거울의 벽을 지나 바위의 북쪽으로 가면 바위의 정상까지 급경사의 철계단이 설치되어 있는 넓은 공간이 나온다. 수직 절벽에 놓여 있는 그 계단을 보고 질려서 더이상 오르기를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계단의 시작 부분은 전술한 돌사자의 두 앞발 사이에 놓여 있다. 이제부터 '사자의 문(목구멍)'을 통과하여 곧바로 정상으로 향하는 것이다. 만일 돌사자가 원형대로 남아 있다면 지금도 방문객들은 거대한 사자의 크게 벌린 입과 목구멍을 지나 위로 올라갈 것이다.
두 앞발에 비추어 사자 전체의 모습을 상상해 볼 때, 사자상은 침입자들에게 겁을 주기에 충분할 만큼 거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누구든 이곳으로 들어온 자는 살아 돌아갈 수 없다’는 무언의 시위를 하지 않았을까. 그만큼 남아 있는 앞발의 크기가 엄청나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사자의 두 앞발]
급경사의 깎아지른 철계단을 끝까지 올라 마침내 정상의 동쪽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11시가 다 되었다. 한 시간 가까이 올라온 셈이다.
정상에는 궁궐 등의 건축물은 없고, 그 터의 흔적만 남아 있다. 밀림의 평원에 돌출하여 우뚝 선 바위의 정상에 오른지라 주변의 풍광이 동서남북 할 것 없이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한 눈에 다 들어온다.
[바위 요새 정상의 궁궐터]
[정상에서 본 서쪽 평원. 가운데 물의 정원이 보인다]
이 요새를 건설하고 궁궐까지 짓고 살았던 카샤파 왕은 자기를 치기 위해 동생이 끌고 오는 군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도 그는 동생의 군대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생을 마감했으니, 아무리 철벽을 자랑하는 요새를 건설한들 민심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사상누각일 뿐이었다.
그게 역사의 냉엄한 교훈이건만, 지금도 이 세상에는 권력만 잡으면 그에 도취해 이성을 상실하고 국민을 헌신짝 취급하는 위정자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렇게 역사는 되풀이된다, 누굴 탓하랴.
궁궐터만 남아 있었다면 염천(炎天) 아래 땀 흘려가면서 정상에 오른 후에 다소 실망할 수도 있었는데, 아직도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수영장(저수지라는 이야기도 있다)이 그런 아쉬움을 씻어준다. 이 거대한 바위 꼭대기에 샘이 있는 것도 아닐진대, 도대체 저 수영장의 물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바위의 남쪽 아래 멀리 보이는 호수의 물을 대나무 파이프로 끌어왔다고 한다. 그대로 믿어야 하나? 불가사의(不可思議)다.
[수영장. 멀리 남쪽 아래로 호수가 어렴풋이 보인다]
정상으로 올라왔던 북쪽 계단을 되돌아 내려가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 아래 사람들이 콩알만 하게 보인다. 이렇게 높이 올라왔었나? 새삼 바위 요새의 험준함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바위 요새의 북쪽 아래 모습]
시기리야의 불가사의를 뒤로 하고 버스에 올라 다음 행선지인 폴론나루와(Poḷonnaruwa)로 이동했다. 스리랑카는 불교를 믿는 싱할라족의 왕국이 2000년 이상 이어져 온 나라다. 그 싱할라 왕국의 첫 수도가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이고, 두 번째 수도가 폴론나루와이며, 마지막 수도는 캔디(Kandy)다.
아누라다푸라가 스리랑카 고대 불교문화의 출발지라면, 폴론나루와는 중세 불교문화 유적의 보고이다. 두 곳 모두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유이다. 10세기에서 12세기까지 폴론나루와가 왕국의 수도였을 때는 불치사(佛齒寺,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모신 절)가 이곳에 있었다. 지금은 후술하듯이 캔디에 불치사가 있다.
폴론나루와로 가는 도중에 커다란 호숫가에 있는 Giritale 호텔에 도착했다(오후 1시 30분). 점심식사를 위해서이다. 1층짜리 목조건물로 된 이 호텔은 뷔페식 식사는 그냥저냥 평범하지만, 호수가 바로 보이는 경관이 좋다. 그래서 시기리야를 찾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호텔 중의 하나이다.
[Giritale 호텔]
점심식사 후 다시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오후 2시 40분에 폴론나루와의 궁궐터에 도착했다. 10-12세기 싱할라 왕국의 왕궁이 있던 곳이다. 대부분 터만 남아 있고, 왕의 접견실과 목욕시설만이 그나마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가 옛날의 영화를 말해주는 이 궁궐터는 당시 건물이 높이 30m의 7층짜리 건물(3층까지는 벽돌조, 그 위는 목조)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13세기 인도 타밀족의 침입으로 왕궁이 파괴된 후 500년 동안 밀림 속에 있다가 1900년대에 발견되었는데, 아름다운 푸른 초원 위에 그나마 남아 있는 건물벽(이 벽에는 서까래를 끼웠던 구멍이 나 있다)이 이끼가 낀 채 검게 퇴색되어 가고 있어 지나는 객의 수심을 자아낸다. 누가 말했던가,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로다”
한 때의 부귀영화도 긴 세월의 흐름 속에서는 한낱 추초(秋草)이고 포영(泡影)일 뿐이다.
[궁궐터의 이모저모]
이 궁궐터 북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 쿼드랭글(Quadrangle. ‘사각형의 개방공간’이라는 뜻이다) 사원이 있다. 폴론나루와 불교 유적의 중심지인 이 사원은 크게 4개의 구역으로 나뉘는데, 불당으로 사용되었던 투파라마(Thuparama), 동서납북의 네 방향으로 불상을 앉힌 원형(圓形)의 바타다게(Vatadage),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안치했던 곳으로 바타다게의 맞은편에 있는 하타다게(Hatadage)와 아타다게(Atadage)가 그것이다.
그 밖에 폴론나루와의 르네상스를 이룬 니상카 말라 왕(Nissamka Malla. 재위기간 1187-1196)의 기도실인 라타 만다파야(Latha Mandapaya), 스리랑카 최대의 석비(石碑)인 갈포타(Gal Potha) 같은 유적도 있다.
[쿼드랭글 사원의 전모. 자료사진]
원형이 거의 보존되어 있는 장방형의 사원 투파라마(Thuparama)는 승려들이 머물면서 공양을 올리고 예배를 드리던 불당으로 사용하던 곳으로 벽돌건물이다. 폴론나루와에 있는 사원 중 가장 완성도가 높고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데, 보수공사를 하려는지 외부에 거푸집이 세워져 있었다. 그래도 신을 벋고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두꺼운 벽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빛이 들어와 다소 어두컴컴한 안에는 석불이 여럿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불상들이 팔이 잘리고 얼굴이 뭉개지는 등 많이 훼손되었다. 이곳을 침입했던 이교도(異敎徒)들의 소행이라고 한다.
내 종교가 중요하면 남의 종교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종교로 인한 분쟁(나아가 전쟁)이 종식되련만, 예나 지금이나 아련한 이야기인 듯하다.
[투파라마 외부 모습 및 내부의 훼손된 석불]
투파라마에 인접한 북동쪽에 원형(圓形. 직경 37m)의 바타다게(Vatadage. ‘vata’는 원형<圓形>을 뜻하고, ‘dage’는 유적이나 집을 일컫는다)가 있다(스리랑카에는 현재 10개의 바타다게가 남아있다). 이 바타다게는 폴론나루와에서 가장 예술적인 건축물로 꼽힌다.
동서남북의 네 군데에 위치한 입구 계단 앞에는 반월석(半月石. Moon Stone)이 있고, 그 앞에서 신과 모자를 벗고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앞에서 좌불상이 객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 뒤 중앙에 사리탑이 있다.
반월석은 사원이나 왕궁 입구에 놓인 반달 모양의 돌장식이다. 코끼리, 사자, 말, 소를 새긴 이 반월석은 열반, 해탈, 윤회를 의미한다. 좌불상을 동서남북 네 곳 계단 위에 조성한 것은 불교가 사방으로 뻗어나가길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바타다게의 전면, 안에 조성된 불상, 계단 입구의 반월석]
바타다게(Vatadage) 맞은편에 하타다게(Hatadage. ‘hata’는 숫자 60을 뜻한다)가 있고 그 옆에 아타다게(Atadage. ‘ata’는 숫자 8을 뜻한다)가 있다.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처음 안치했던 곳이 아타다게이고, 나중에 새로 지어 안치한 곳이 하타다게이다.
현재 아타다게는 54개의 기둥과 한 개의 석불상(오른팔이 잘려나갔다)만 남은 상태이다. 반면, 장방형(27mx37m)의 하타다게는 그래도 사면의 담장이 남아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비록 훼손되었을망정 석불들이 많이 있다. 목이 잘린 불상, 몸통은 아예 없고 두 발만 남은 불상 등 보는 이로 하여금 처연한 심정을 들게 하는 유적들이 신발을 벗고 들어온 객을 맞는다.
[아타다게]
[하타다게의 입구와 내부의 석불]
하타다게 동쪽 담장 바로 밑에는 스리랑카 최대 석비인 갈포타(Gal Potha. 길이 8.2m, 폭 1.5m. 두께 40-66cm. ‘Stone Book’이라고도 한다)가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 인도 타밀족의 침략사, 하타다게를 세우고 이 석비를 만든 니상카말라 왕에 대한 찬양의 글이 새겨져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새겨져 있다고 해서 석장경(石藏經)이라고도 하는데, 석장경으로는 세계 최대이다. 본래 종전 수도인 아누라다푸라 근방에 있었던 것을 폴론나루와로 수도를 이전하면서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갈포타]
쿼드랭글 사원에서 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갈 비하라(Gal Vihara. gal은 ‘돌’, vihara는 ‘사원’이라는 뜻이다) 사원이 있다. 12세기 후반에 파라쿠라마 바후 1세가 분열된 종단을 바로잡고 체계적인 승려교육을 위해 조성한 사원이다. 사원은 13세기 남인도 타밀족의 침입으로 파괴되고 지금은 4개의 석불만 남아 있다.
오후 3시 50분, 땡볕 아래 이곳에 도착하자 싱할라족 예술의 걸작으로 꼽히는 거대한 바위 조각품이 반긴다. 나그네더러 ‘오느라 수고했다’고 하는 듯하다. 길이가 51m나 되는 하나의 화강암 바위에 일렬로 조각한 4개의 불상! 감탄이 절로 난다.
[갈 비하라 전경]
맨 좌측에는 높이 5m의 좌불이 있고, 중앙에는 바위를 깎아(깊이 1.4m) 석굴의 감실을 만든 다음 그 안에 좌불을 안치했다. 감실 전면에는 두 개의 기둥을 조각했다. 감실 우측에는 팔짱을 끼고 선 높이 7m의 입상이 있는데, 부처님의 열반을 애도하는 아난존자의 상이라고 한다(부처님의 상이라는 설도 있다).
불상의 손 모습을 의미하는 수인(手印)이 여러 행태지만, 이렇게 팔짱을 낀 모습은 처음 본다. 발품에 비례하여 견문이 넓혀진다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님을 실감한다. 마지막으로 맨 우측에는 길이 14m의 와불이 있다. 부처님이 오른손을 베고 안온하게 열반하신 모습이 보는 이의 마음도 편안하게 한다.
그나저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걸작품을 보호한답시고 바위 위에 만든 지붕이 너무 안 어울린다. 마치 무슨 운동장 본부석 지붕 같다. 좀 더 어울리는 예술적인 지붕을 만들 수는 없을까.
[좌측 좌불]
[중앙 감실의 좌불]
[아난존자]
[와불]
오후 4시, 뜨겁게 빛나는 태양 아래 좌상, 입상, 와상의 불상들을 둘러보느라 타들어간 목을 야자수로 축였다. 야자열매의 윗부분을 칼로 도려내고 빨대를 꽂아 안에 들어 있는 수액을 빨아 마셨다. 더운 지방에서 애용하는 천연 음료수이다.
맛은 달짝지근한데 야자열매를 얼음상자에 보관하기 때문에 시원한 게 그만이다. 다만, 양이 많아 다 마시지는 못했다. 야자수액 마시기는 2003년 12월에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 갔다가 처음 해 본 이래 두 번째 경험이다.
시기리야를 시작으로 한 하루 일정을 다 마치고 다시 담블라의 호텔로 돌아오니 오후 6시다. 아직 해가 있어 물이 차지 않은지라 숙소 앞의 넓은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잠시 쉬다가 7시 30분에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전술했듯이 이 호텔의 식사는 풍성하고 맛도 좋은데, 이날 저녁에는 식당 앞 잔디밭에서 악사가 기타를 연주하며 분위기를 돋우었다. 특히 그가 우리말로 부르는 ‘아리랑’이 정겹게 들렸다.
[기타를 연주하며 아리랑을 부르는 스리랑카 악사]
2020. 1. 16.(담블라-->캔디-->누와라엘리야)
하루를 다소 여유있게 보내는 날이다. 그래서 아침 일정이 7시 기상-->8시 식사-->9시 출발로 평소보다 1시간씩 늦춰졌다. 덕분에 전날처럼 숙소 주위 풀밭과 호숫가를 한 바퀴 돌았다.
영상 19도의 쾌적한 기온에, 상큼한 풀내음이 코끝을 스치고, 호숫가를 노니는 백로들이 나그네의 눈을 즐겁게 한다. 모든 게 평화롭기만 하다. 몇 날이고 머물면서 쉬면 참으로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9시에 출발해서 2시간 걸려 캔디(Kandy)에 도착했다. 스리랑카의 중부지방 해발 488m에 위치한 인구 15만 명의 캔디는 15세기에 건설된 고도(古都)로서, 1815년 영국 식민지가 되기 전까지 싱할라 왕조의 마지막 수도였다.
그래서 스리랑카의 전통적인 면모를 간직하고 있으며, 경관이 아름답고 교통·상업의 요지이자 문화·교육의 중심지이다. 지금도 스리랑카인들의 정신적 고향이자 정신적 수도이다.
시내 중앙에 인공호수인 캔디호수가 있고, 호수의 북안에 불치(佛齒. 부처님의 치아)를 안치한 불치사(정식 명칭은 Sri Dalada Maligawa로 ‘부처의 사리가 있는 궁’이라는 뜻이다)가 있다. 스리랑카에서 가장 신성한 사찰로, 전 세계 불교도들의 순례장소이기도 하다. 흰 벽에 붉은 기와를 얹은 건물 모습이 정갈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불치사는 1600년경 2층짜리 건물로 처음 건립된 이래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했다. 특히 1998년에는 타밀 반군의 폭탄 테러로 사원이 거의 전소되다시피 했는데, 신기하게도 불치를 모신 전각은 천장만 날아갔을 뿐 다른 손상은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 테러로 파괴된 전각들을 2003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불치사 전경]
불치는 인도 칼링가 왕국에서 312년 스리랑카에 최초로 전해진다. 불치가 이곳까지 오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부처님이 열반한 후 수습된 사리는 여덟 나라가 나눠 봉안키로 했다. 사리 가운데에는 4개의 불치가 있었고, 그 중 하나가 칼링가 왕국으로 보내졌다. 이 불치가 800여 년간 칼링가 왕국에 봉안돼 있었는데, 4세기 초에 이르러 칼링가 왕국이 대기근과 이교도의 침입으로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그래서 더 이상 불치를 안전하게 봉안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새로운 봉안처로 스리랑카의 싱할라 왕국이 선택되었다.
불치 이운의 막중한 임무는 공주 헤마말라(Hemamala)에게 주어졌고, 헤마말라는 틀어 올린 자신의 머리카락 속에 불치를 숨기고 남편 단타(Dantha)와 함께 몰래 왕국을 빠져나와 스리랑카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칼링가 왕국의 공주가 불치를 이운해 왔다는 소식에 싱할라 왕국의 왕이 직접 바닷가로 나가 불치를 전해 받은 후, 보석으로 치장한 코끼리 위에 불치를 모시고 수도인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로 돌아왔다.
이후 불치는 이를 모신 사람이 싱할라 왕국의 지배자로 인식되어 왕권의 상징이 되었고, 스리랑카인들의 확고한 신앙대상으로 자리잡았다. 그 후 불치는 싱할라 왕국의 성쇠에 따라 폴론나루와를 거쳐 이곳 캔디로 옮겨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편 칼링가 왕국의 공주로부터 처음 불치를 전해 받아 코끼리 위에 모시고 아누라다푸라로 이운한 것이 시초가 되어, 싱할라 왕국에서는 국왕이 주재하고 백성이 참여하는 페라헤라(Perahera) 축제가 매년 열렸다.
그리고 그 전통이 이어져 지금도 매년 7월에는 캔디에서 페라헤라 축제가 열흘 동안 열려 전 세계에서 백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모여든다.
화려하게 장식한 수많은 코끼리의 거리 행진이 축제의 백미로 꼽히는데, 목욕재개를 마친 코끼리 60마리가 불치사를 출발해 시내를 돌아 다시 불치사까지 왕복 5km를 행진하며 장관을 연출한다.
이들 코끼리들 중에서도 특히 불치를 이운하는 코끼리가 축제의 주인공인데, 오랫동안 이 축제의 주인공이었던 코끼리가 죽자 이를 박제하여 불치사 안의 라자박물관(Raja Museum)에 전시하고 있다.
불치사도 안으로 들어가려면 당연히 신을 벗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입구에서 소지품 검사까지 한다. 그만큼 중요한 사원이기 때문이다. 아직 정오가 되기 전이지만 사원 안은 참배하러 온 신도들과 구경하러 온 관광객으로 붐볐다.
마침 커다란 코끼리 한 마리가 여기는 내가 주인인데, 멀리서 온 당신들을 환영한다는 듯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인도의 힌두교 사원에서 소가 대접을 받듯이 여기서는 코끼리가 대접을 받는 듯하다.
[불치사 안을 걷고 있는 코끼리]
멀리서 본 불치사의 단순하고 정갈한 모습과 달리 전각의 내부는 장식이 화려하다. 사원 중앙의 안뜰에 있는 장방형의 전각(지붕이 황금색이다) 2층에 불치가 봉안된 사리함이 있다. 그래서인지 2층은 바닥이 마루이다. 그만큼 신성한 구역이라는 뜻이 아닐까.
사리함이 있는 방실은 전면에 좌우로 커다란 상아가 마치 호위병처럼 놓여 있다. 방문은 굳게 닫혀 있는데, 그 앞에서 흰색 옷을 입은 많은 스리랑카인들이 꽃을 바치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성지 순례에 나선 인도의 힌두교도들이 대개 붉은색이나 노란색 계통의 화려한 옷을 입는 데 비하여, 스리랑카의 불교도들은 거의 흰색 옷을 입는다. 학생들 교복도 흰색이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스리랑카에서 흰색은 평등과 순결을 상징한다고 한다.
[사리함이 있는 방과 그 앞의 참배하는 스리랑카인들]
정작 사리함은 아쉽게도 직접 볼 수가 없었다. 사진을 보면 종탑 모양에 루비와 사파이어·다이아몬드 등으로 장식하고, 둘레에 7겹의 황금띠를 둘렀음을 알 수 있다.
사리함이 모셔진 사당 건물의 캐노피 천정은 연꽃무늬로 장식을 했는데, 그 연꽃무늬가 모두 순금이라고 한다. 불치사는 정말 예사스러운 곳이 아니다.
[사리함. 자료사진]
[캐노피 천장의 순금으로 된 연꽃무늬]
이 사당 건물 뒤편에 법당이 있는데, 중앙의 황금빛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 여러 나라에서 보내온 불상들이 놓여 있다. 그 중 유일하게 검은 머리를 한 부처님이 한국에서 보내온 불상이다.
그리고 이 법당의 벽에는 불치가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전해져 오기까지의 전술한 것과 같은 과정을 차례로 그린 불화들이 걸려 있다.
[법당과 한국에서 온 검은 머리 불상]
불치사는 스리랑카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막중하여 안에 박물관도 여럿 있다. 불치에 관한 역사적 기록과 역사적 유물, 캔디에서 왕국을 통치한 싱할라 왕들의 초상화와 흉상을 전시한 불치박물관. 왕국의 역사적 연대기에 관련된 유물을 전시한 국립박물관. 한국을 비롯한 17개 국가의 불상, 불화, 조각들을 전시한 세계불교박물관, 전술한 페라헤라 축제의 주인공이었던 코끼리를 박제하여 전시한 라자박물관 등이 그것이다.
불치사를 둘러보고 나오니 어느새 오후 1시가 다 되었다. Kandyan Arts라는 호텔로 가서 그곳 5층의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뷔페식당이었는데 아침을 먹었던 담블라의 호텔 식당 음식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뭐람... 음식은 제쳐 두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캔디의 경치가 아름다워 애써 눈에 담아두었다. 언제 또 올 수 있으려나.
[Kandyan Arts 호텔과 그곳에서 바라본 캔디의 경치]
불치사도 보고 배도 불렸으니 이제 남은 여정은 캔디를 떠나 홍차의 고장 누와라엘리야(Nuwara Eliya)로 가는 것이다.
오후 2시 10분 버스에 올랐다. 캔디의 해발고도가 488m인 데 비하여 누와라엘리야는 해발 1,868m의 고지대이기 때문에 이곳으로 가려면 말 그대로 꼬볼꼬불 산골길(편도 1차선)을 계속 올라가야 한다. 더구나 점심 식사 후 바로 출발한 까닭에 집사람이 멀미를 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에 그쳐 다행이다.
스리랑카의 유명한 차산지(茶産地)로 가는 여정에 걸맞게 꼬불꼬불 올라가는 산골길의 양옆은 녹색 차밭의 연속이다.
[누와라엘리야 가는 산골길과 차창에 비친 차밭]
끝이 없이 이어지는 저 넓은 차밭의 찻잎을 누가 어떻게 딸까 궁금했는데, 그 궁금증은 도중에 들른 차 공장에서 풀렸다.
차를 제조하는 공정을 볼 수 있고, 이곳에서 만든 차를 시음(시음용으로 주는 차의 양이 너무 적어 맛을 제대로 알 수 없다)할 수 있는 이 공장의 백미는 직접 찻잎을 따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망태를 하나 등에 짊어지고 공장 건물 뒤에 있는 차밭으로 가니 여인들이 찻잎을 따고 있었다. 바로 타밀족 여인들이다.
[차 공장]
땡볕에서 하루 종일(대략 10시간 정도) 손으로 찻잎을 따는 이 여인들의 일당은 대략 우리 돈으로 1만 원 정도이다. 전체 국민소득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 보성, 해남, 하동 등 차 산지에서 찻잎을 따는 일당이 8~10만 원인 것과 단순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타밀족 여인들의 애환이 서린 차가 바로 스리랑카 홍차라는 사실에 숙연해졌다.
함께 찻잎을 따고 가념사진을 찍은 후 팁으로 1달러를 주니까 너무 좋아한다. 관광객들한테 그렇게 받는 돈이 더 큰 수입이 될지도 모르겠다.
[차밭에서 타밀족 여인과 함께]
스리랑카의 홍차는 등급이 있다. 우선 홍차의 재료가 되는 찻잎을 분쇄하여(Broken type) 만들었는지, 아니면 잎 전체를 그대로 이용하여(Whole leaf type) 만들었는지에 따라 일차 등급이 분류된다. 꼭 맞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촌부의 식견으로는 분쇄한 차보다는 잎차가 질이 더 좋다.
입차는 다시 사용한 찻잎의 크기에 따라 등급이 FOP(Flowery Orange Pekoe), OP(Orange Pekoe), P(Pekoe), PS(Pekoe Souchong), S(Souchong)로 분류된다.
FOP는 차나무 가지 끝에 난 새싹으로만 만들어진 최고급 홍차이다(우리나라 녹차 중 우전을 생각하면 된다. 여기서 ‘flowery’는 꽃이 아니라 ‘잎의 눈’을 의미한다). 그만큼 귀하고 고가여서 스리랑카의 차 매장에서도 구하기가 쉽지 않다.
OP는 새싹 바로 아래에 붙어 있는 어린잎으로 만든 홍차이다(우리나라 녹차 중 세작). FOP가 귀하다 보니 보통 이 OP급의 홍차를 고급으로 친다.
P는 OP의 바로 아래의 큰 잎(우리나라 녹차 중 대작), PS는 그보다 더 아래, S는 그보다 또 더 아래의 크고 늙은 잎으로 만든 차이다. 결국 순차적으로 품질이 떨어진다. PS와 S는 보통 기계로 채엽하여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는데, 티백용으로 많이 사용된다.
FOP나 OP 앞에는 다른 수식어가 붙기도 하는데, BFOP, BOP처럼 B가 붙은 것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다. 이때의 B는 분쇄한(Broken) 찻잎이라는 의미다. 그렇다고 100% 분쇄한 것은 아니고 BOP의 경우 대략 60%가 분쇄한 것이다(40%는 분쇄하지 않은 잎).
스리랑카 홍차는 보통 이처럼 원료인 찻잎의 크기에 따라 등급을 분류하지만, 그 산지(産地)가 어디냐에 따라서도 고급차와 그렇지 않은 차로 구분하기도 한다.
스리랑카의 차는 섬 중앙 산맥에서 주로 재배되는데, 그중 누와라엘리야, 딤불라(Dimbula), 우바(Uva)처럼 해발고도 1,200m 이상의 고산지대에서 생산되는 차(high grown tea)를 고급으로 친다. 보다 산뜻하고 향긋한 향이 특징이다. 고도가 그보다 낮은 캔디(Kandy) 등 중산간지대(해발고도 600~1,200m)에서 생산되는 차(medium grown tea)는 부드럽고 깔끔한 맛과 향이 특징이다. 해발고도가 낮고 바다와 가까운 루후나(Ruhuna) 등 저지대(해발고도 600m 이하)에서 생산되는 차(low grown tea)는 진하고 깊은 맛을 낸다.
한편, 스리랑카 홍차를 상표명으로 보면, 바질루르(Basilur), 믈레즈나(Mlesna), 딜마(Dilmah)가 고급차에 속한다. 그리고 산지명이 그대로 상표로 된 우바, 누와라엘리야, 딤블라 등도 고급차에 속한다. 물론 이러한 상표의 홍차들 중에서도 전술한 FOP나 OP 등급의 차일 경우에만 고급이라 할 수 있다.
오후 6시에 누와라옐리야에 도착했다. 전술한 대로 해발 1,868m에 달하는 고지대에 있는 도시이다. 19세기 식민지 시대에 영국인에 의해 발견되고 건설되었기 때문에 건물의 대다수가 영국풍을 띠고 있고, 심지어 새로 짓는 호텔조차 그 형식을 따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오래된 영국식 잔디와 정원을 유지하고 있는 개인 집들도 많다.
차창에 어리는 골프장, 유람선이 있는 호수, 축구장 등도 다 그런 유산이다. 그래서 그렇게 보이는 걸까, 휴양을 즐기는 서양사람들이 유난히 많아 보였다.
역시 영국풍으로 지어진 Araliya Green Hills 호텔에 짐을 풀었다. 약간 언덕진 곳에 있는지라 가까운 시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 풍경만으로는 이곳이 스리랑카인가 영국인가 헷갈릴 정도이다.
지대가 높아 여름에도 선선하고, 하늘은 청정하고, 무엇보다도 자기들이 좋아하는 양질의 홍차가 나오는 곳, 누와라엘리야는 예나 지금이나 영국인들에게 매력적인 곳임에 틀림없다.
[Araliya Green Hills 호텔]
[호텔 주위의 모습]
호텔의 뷔페식 식당은 양과 질에서 만족스러웠다. 식후에 마시는 차의 맛도 입안을 즐겁게 했다. 같은 고산지대 차(high grown tea) 중에서도 누와라엘리야산 홍차는 우바나 딤불라 산에 비하여 섬세하고 깔끔한 맛을 낸다.
그래서 이곳에서 나는 홍차를 ‘실론 홍차의 샴페인(Champagne of Ceylon tea)’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는 인도의 다르질링(Darjeeling) 홍차를 ‘홍차의 샴페인’이라 부르는 것에 빗대어 하는 말인데, 기본적으로 누와라엘리야는 스리랑카의 다른 차산지보다 다르질링 품종의 차를 재배하는 비율이 높다고 한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 안의 상점에 들어가 딜마(Dilmah) 차(OP급. FOP급은 매장에 없었다)를 몇 통 구입했다. 호텔의 상점임에도 가격이 저렴했다. 딜마는 스리랑카 홍차 수출(스리랑카는 세계에서 홍차 수출 1위 국가이다)의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홍차 브랜드로, 고급 찻잎을 수확하여 발효 후 바로 가공해 신선함이 뛰어나다.
2020. 1. 17.(누와라엘리야-->호튼플레인즈 국립공원-->엘라-->웰라와야)
새벽 5시에 일어나 서둘러야 할 정도로 일정이 바쁜 날이다. 6시에 도시락을 하나씩 배분받은 후 대기 중이던 밴에 나누어 타고 호튼 플레인즈 국립공원(Horton Plains National Park. 호튼은 식민지 시대 이곳을 방문한 영국 총독의 이름)을 향해 출발했다.
누와라엘리야 자체도 고산지대이지만, 이 국립공원은 그보다 더 높은 곳(스리랑카에서 세 번째로 높은 고원지대이다. 해발 2,200~2,300m)에 있는지라 이날도 예외 없이 꼬불꼬불 산골길을 1시간 달려 입구에 도착했다.
이곳은 2010년 ‘세계 복합 문화·자연 유산(Mixed Cultural and Natural World Heritage Site)’으로 지정된 곳이다. 고원지대임에도 갖가지 꽃, 향료,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약 750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그렇지만 사실 이곳은 멋진 풍광이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무슨 진기한 식물이나 동물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계적인 희귀동물인 슬렌더 로리스(Slender Loris)가 있다고 하나 일반들의 눈에는 쉽게 띄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힘들여 이곳을 찾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다름 아닌 공원 안에 있는 World’s End Trail을 따라 3시간 정도 하이킹을 하기 위한 것이다.
일체의 상념에서 벗어나 대자연의 품속에서 푸근한 황톳길을 걷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찌든 삶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픈 마음에서 찾는 것이다. 그게 전부이니 어찌 보면 싱거운 일이다.
[호튼 플레인즈 국립공원 개념도]
[안개 낀 아침 풍경]
아침 7시의 이른 시각인데도 공원 관리사무소 앞 주차장에는 이미 탐방객을 싣고 온 차들이 많이 있었다. 더운 날씨에 대부분 땡볕 아래 걸어야 하기도 하거니와, 오후에는 이곳의 날씨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탐방을 가능한 한 일찍 마치려는 것이다.
가져온 도시락으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7시 40분에 World’s End Trail 하이킹에 나섰다. 그런데 하이킹 출발지점에서 하는 소지품 검사가 매우 까다롭다. 무엇보다도 비닐 제품의 반입이 철저히 금지되어 있어, 생수를 담은 페트병의 비닐 라벨까지도 다 떼어야 한다. ‘세계 복합 문화·자연 유산’을 잘 보존하려는 스리랑카의 노력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하이킹 코스를 알리는 이정표]
왕복 9.5km의 World’s End Trail 하이킹 코스는 전술한 대로 대부분 황톳길이다. 경사가 급한 곳도 거의 없이 평탄하다. 후반부에는 그나마 우거진 숲길도 나오지만, 전반부에는 땡볕 아래 걸어야 한다. 따라서 다소 지루할 수도 있다.
그 길을 따라 앞서거니 뒷서거니 걷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다. 그냥 능력껏 걸으면 된다. 가다가 힘들면 돌아가도 된다. 실제로 집사람은 40분 정도 걷다가 돌아갔다.
[황톳길과 기울어진 나무]
그렇게 걷다가 귀한 장면을 하나 목격했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풀잎이 햇빛을 받아 진주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장면이다. 그게 무에 그리 대수냐고 할 수도 있지만, 촌자의 눈에는 경이롭게 다가왔다.
일미진중에 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작은 이슬방울 속에서 천하를 볼 수 있는 혜안을 구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양희은의 ‘아침이슬’을 흥얼거리며 노래 분위기에 젖어 본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아침이슬]
출발하여 한 시간쯤 지나 하이킹 전반부의 유일한(?) 볼거리라고 할 베이커 폭포(Baker’s Fall)에 다다랐다. 트레일 내내 유유하게 따라오던 강이 낭떠러지에서 폭포로 변한 곳이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가 등에 젖은 땀을 식혀 준다. 마침 그곳에 있던 한 쌍의 젊은 서양인에게 부탁하여 사진을 남겼다.
[베이커 폭포]
폭포를 지나 30분 정도 부지런히 발길을 옮겨 오전 9시 20분에 마침내 하이킹 코스의 점인 ‘세상의 끝(World’s End)‘에 도달했다. 하이킹을 시작하면서부터 왜 이 코스를 ‘World’s End Trail’이라고 이름지었을까 궁금했는데, 이곳에 도착하니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겠다.
‘세상의 끝(World’s End)‘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새긴 커다란 표지석 바로 옆이 무려 800m의 수직 낭떠러지이다. 그리고 그 건너편 산 위로는 하얀 운해가 펼져진다. 그곳이 혹시 도솔천(兜率天) 아닐까. 한 발만 삐끗하면 이승과 하직하고 저승으로 갈 판이니 ’세상의 끝‘이 아니고 무엇이랴.
[세상의 끝]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 놓인 ’세상의 끝‘에서 이승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한 번 저승사자가 아른거리는 곳을 지나게 된다. 이름하여 ’작은 세상의 끝(Little World’s End)‘. 이곳은 270m 낭떠러지 위이다.
그러나 이미 ’세상의 끝‘을 다녀온 나그네들에게는 이곳은 더이상 관심을 끌지 못한다. 안내판조차 초라해 보인다. 이곳에 먼저 왔더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려나.
[‘작은 세상의 끝’ 안내판]
이후의 길은 숲이 많아 걸음걸이가 수월하다. 그 숲에서 기린의 목을 닮은 나뭇가지가 촌부의 시선을 끈다. 그런가 하면 숲의 저편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파란 하늘이 펼쳐지는데, ‘햇님이 쓰다 버린 쪽박’ 하나가 그 아래의 이름 모를 나무와 하모니를 이루어 나그네의 발길을 부여잡는다. 무에 그리 바쁘다고 서둘러 가냐고 나무라는 듯하다.
[기린 목을 닮은 나뭇가지]
[햇님이 쓰다 버린 쪽박과 이름 모를 나무]
‘세상의 끝’에서 호텔로 돌아오니 11시 반이다. 간밤에 묵었던 객실로 올라가서 샤워를 한 후 식당으로 가 점심 식사를 했다. 메뉴는 볶음밥, 파스타, 닭고기, 생선. 부실했던 아침 식사 덕분인가 먹을 만했다.
오후 1시 50분 다음 행선지인 엘라(Ella)로 출발했다. 2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다. 이번 여정 내내 신기할 정도로 날씨가 맑았는데, 마침내 빗방울이 차창을 두드린다. 더위를 식히는 것은 좋지만 많이 오면 안 되는데... 상념에 잠긴다.
오후 4시에 엘라에 도착했다. 해발 1,041m에 위치한 작은 산악도시(마을?)인 이곳은 '스리랑카의 알프스'라고 불릴 정도로 풍광이 빼어난 곳이다. 그 중에서도 스리랑카 홍보물에 가장 많이 나오는 ‘나인 아치 브리지(Nine Arch Bridge)’가 특히 유명하여, 동방 나그네들의 이날 발걸음도 오로지 이 다리를 보기 위함이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양이 많지는 않아도 비가 계속 내린다. 시내에서 나인 아치 브리지까지는 툭툭(TukTuk)을 타고 이동했다. 주로 택시로 이용되는 이 삼륜차를 인도에서부터 한번 타보고 싶었는데, 마침내 소원을 풀었다.
운전사 빼고 두 사람이 타기에 딱 알맞은 이 차에 인도에서는 여덟 명까지 탄 것을 보았다. 처음에 보았을 때는 굴러가는 게 용하다 싶었는데, 막상 타보니까 생각 밖으로 잘 달렸다.
[툭툭]
비가 계속 와서 다리를 못 보는 것은 아닌가 노심초사하는 나그네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툭툭에서 내리니 비가 그쳤다. 천우신조(天佑神助)라는 말을 이럴 때 써도 되는지 모르겠다. 툭툭에서 내린 곳은 언덕 위라 철길까지는 걸어 내려가야 한다. 마침 기차가 지나간다. 외양은 오래 되었지만 왠지 정겹게 보인다.
철길에 올라선 후 다리까지는 다시 10분 정도 걸어야 한다. 방금 기차가 지나갔으니 다시 오려면 한참 걸릴 터라(하루에 6-7회 다닌다고 한다) 안심하고 걸었다. 철길을 걷는 낭만을 마지막으로 즐겼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이 철길은 19세기 중반 영국 식민지 시절에 고산지대에서 콜롬보까지 차(茶)를 실어 나르기 위해 영국인들이 단선(單線)으로 건설한 것이다. 그 위로 지금도 기차가 다니고 있으니 스리랑카 역사의 산 증인인 셈이다.
[나인 아치 브리지 가는 철길]
나인 아치 브리지(Nine Arch Bridge)는 울창한 밀림 속에 아찔한 높이의 깊은 계곡 위에 세워진 곡선형의 하늘다리(Bridge In the Sky)이다.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는 이야기도 있다.
빗방울이 다시 오락가락하는데도 많은 선남선녀들이 다리를 배경으로, 또는 아예 다리 위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멋진 풍광을 즐기는데 그깟 날씨쯤이야...
9개의 둥근 교각으로 된 이 다리는 1921년 영국 식민지 시대에 완성된 것으로, 건설 도중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바람에 철근을 공급받을 수 없어 공사가 중단되자 현지인들이 석재 벽돌과 시멘트로만 완성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스리랑카의 자존심이 반영된 역사의 현장이다.
터널을 빠져나온 기차가 주변의 울창한 숲과 어우러진 이 다리 위의 곡선으로 휘어진 선로를 지나는 모습은 꼭 동화 속에 나오는 한 폭의 그림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 기차를 타고 옛날로 돌아가고픈 마음이다. 이 다리는 그 정도로 나그네의 동심을 자극한다.
[나인 아치 브리지. 위는 자료사진]
한 시간 가까이 동심의 동화 속에서 보내다 현실세계로 돌아와 이날 묵을 숙소가 있는 웰라와야(Wellawaya)로 이동했다. 스리랑카에서 이제까지 다녀온 곳이 거의 다 그랬지만 웰라와야는 특히 녹색의 항연이 펼쳐진 곳이다.
4모작이 가능한 스리랑카지만 한겨울에도 짙은 녹색을 띠고 벼가 자라고 있는 논들의 풍경이 어릴 적 고향을 생각나게 한다. 붕어와 미꾸라지를 잡으며 놀던 도랑이 있고, 참외를 깎아 먹던 원두막이 있는 곳, 그 논 위로 저물어가는 가는 태양이 남긴 황혼빛이 참으로 몽환적이다.
[웰라와야의 논 풍경]
웰라와야에서 묵은 숙소(Jetwing Kaduruketha)는 그야말로 친환경적인 리조트(호텔)이다. 오후 6시에 입구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린 후 녹음이 우거진 숲속으로 난 흙길을 10여 분 걸어갔다. 원하면 툭툭을 탈 수 있으나,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
이 숲속에 있는 리조트(호텔)는 사무실과 식당이 있는 본부를 비롯하여 숙소인 방갈로까지 모두 1층이다. 넓은 부지에 야자수를 비롯한 나무들과 초원이 어우러지고, 주위에는 논까지 있다. 나무 위에서는 공작새가 자태를 뽐내며 손님을 반긴다. 이 평화로운 분위기에 걸맞게 직원들도 매우 친절하다.
[Jetwing Kaduruketha 리조트의 모습]
7시에 저녁 식사를 위해 간 식당도 뷔페식이 아니라 전형적인 양식당 분위기이다. 메뉴는 돼지고기와 생선 중 선택할 수 있어, 집사람과 골고루 하나씩 주문했다. 분위기에 어울리게 맛도 좋았다.
다음 날 아침 식사 때 주방장이 각 테이블마다 돌면서 인사를 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서 제공되는 요리는 모두 근처에서 유기농으로 가꾼 재료를 이용한다고 한다.
[리조트의 저녁 식사]
저녁 식사를 끝낸 후 숲속으로 난 길을 따라 객실로 가는 길은 나뭇가지 사이로 걸린 하현달이 빛나고 있었다. 객실은 방갈로 형태의 독립된 별채이다. 친환경의 리조트답게 객실에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없다. 기본적으로 더운 지방이긴 하지만, 산악지대에 있는 밀림 속이라 사실 그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는 못했다. 다만, 한여름은 어떨지 모르겠다.
그런데 전화기 충전을 위해서는 유럽형 어댑터가 필요하다. 혹시 몰라 서울에서 출발할 때 챙겨오길 잘했다. 특이한 것은 모기장이다. 방갈로 한 채 한 채가 다 숲속에 있다 보니 아무래도 모기장이 필요하다.
이래저래 마치 요정들이 사는 숲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공작새 우는 소리에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방갈로와 모기장]
[공작새]
[아침 식사 후 주방장과 함께]
2020. 1. 18.(웰라와야-->웰리가마-->갈레)
새소리에 새벽 5시 30분에 잠이 깼다. 문 밖으로 나서니 영상 19도의 맑고 상쾌한 날씨에 물소리마저 청량하다. 하늘에는 간밤에 보았던 하현달이 아직 떠 있다. 다음날이면 한양으로 돌아갈 동방 나그네를 환송하려고 기다렸나 보다.
6시 30분에 시작된 아침 식사가 촌부를 당황케 했다. 전날 저녁 식사야 그렇다 쳐도, 아침 식사만큼은 여행 내내(굳이 이곳만이 아니라 세계 어디를 가든) 뷔페식에 익숙해 있던 촌부에게는 직원이 순서에 맞추어 가져다주는 식사가 어쩐지 어색했다. 빵, 계란프라이, 토스트, 오트밀, 과일, 홍차(또는 커피)로 구성된 코스요리가 정갈하면서도 입에 맞았다.
식사를 마치고 리조트 안의 숲속과 논두렁을 거닐고 그네도 타면서 멋진 휴양지를 떠나는 아쉬움을 달랜 후 8시에 버스에 올랐다. 이 날은 갈 길이 멀다.
담블라로부터 시작하여 이제껏 스리랑카의 중부 산악지대에서만 지낸 여정이 서서히 막을 내리면서, 동방나그네들을 태운 버스가 남쪽의 바닷가를 향해 달린다. 12시가 넘어가자 마침내 인도양의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고, 오후 1시에 웰리가마(Weligama)에 도착했다.
웰리가마는 서핑(Surfing)으로 이름난 곳이다. 전 세계에서 서퍼들이 몰려든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서핑이 아니라 리티판나(Ritipanna)라는 스리랑카 남부 해안의 전통 외기둥낚시(stilt fishing)를 체험하기 위해 온 것이다.
이 낚시는 바닷가에 긴 말뚝(외기둥)을 박고 중간에 나무를 가로질러 고정시킨 다음 그 위에 걸터앉아 한 손은 장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낚싯대를 잡아 물고기를 낚는 것이다.
3달러를 내고 안내인을 따라 바닷가로 내려서서 기둥의 가로지름대 위에 올라앉았다. 그러자 안내인이 낚시 바늘에 미끼를 꿰어 준다. 자리의 불편함을 감수한 채 바다에 낚시를 드린 강태공이 되었건만 무심한 파도만 밀려오고 갈 뿐 물고기들은 입질을 할 생각을 안 한다. 정오를 지난 태양은 왜 그리도 작열하는지...
촌부 주제에 누구처럼 세월을 낚을 것도 아니고, 더위와 기다림에 지쳐 기둥에서 내려와 보니 낚시 바늘에 꿰었던 미끼만 오간 데 없다. 오호라, 분수를 모르고 인도양의 물고기를 낚으려다 관광업자의 낚시에 낚였네그려.
[외기둥낚시]
이 낚시방법은 본래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산호초 위에 남겨진 쇠기둥 위에서 어부들이 낚시를 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스리랑카 남부 해안지역은 물고기가 많이 사는 곳으로서, 그물을 사용하여 대량으로 잡으면 금방 씨가 마르고, 배를 타고 낚시를 하자니 파도가 심해, 궁리 끝에 나온 방법이 이 낚시라고 한다. 그러나 2004년 밀어닥친 쓰나미 이후 어획량이 급격히 감소한 데다, 해양스포츠가 활성화되면서 해안지역이 상업화되어 낚시 장소가 줄어들어 지금은 관광객을 위한 볼거리로만 존속하는 실정이다.
오후 2시에 갈레(Galle)에 도착했다. 콜롬보 남동쪽 약 100km 지점에 있는 이 도시는 16세기 초 포르투갈인에 점령당해 실론섬의 주요 항구로 돠었고, 다시 1640년대에 포르투갈 대신 들어선 네덜란드인에 의해 요새화되었다. 그리고 영국 식민지 시대로 접어들어 1870년에 콜롬보항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스리랑카 최대의 항구였다.
현재도 스리랑카 서남부의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서 큰 몫을 하고 있으며, 요새 안은 관광객이 넘쳐난다. 요새는 198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갈레 포트]
[바닷가의 성채]
갈레는 도심으로 버스가 못 들어가 외곽에서 내린 후 툭툭을 타고 요새 안에 있는 고풍스런 호텔(The Heritage Galle Fort)로 가서 짐을 풀었다. 여행사 측에서 점심 값으로 1인당 20불씩 나누어 주어 집사람과 함께 시내 구경을 나섰다. 5시 30분까지 자유시간이다.
[The Heritage Galle Fort 호텔 입구와 내부 정원]
무릇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다. 번화가로 보이는 거리의 양 옆에 있는 식당들을 몇 군데 기웃거리다 한 군데(Pedlar's Inn Gallery) 자리를 잡았다.
실내로 안 들어가고 길가 쪽에 놓인 식탁에 앉아 참치 스테이크와 아보카도 샌드위치를 주문했는데 실망이다. 맛도 없고, 아보카도 샌드위치에는 정작 아보카도가 없다. 팥 없는 팥빵인 셈이다. 종업원에게 불평하자 뒤늦게 아보카도만 따로 가져다준다. 그렇게라도 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나무로 만든 허름한 식탁과 의자가 오히려 운치가 있어 보여 고른 집인데, 그만 헛다리를 짚은 셈이다.
[갈레 거리의 식당에서]
식사 후 지도를 보며 도심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포르투갈인들이 16세기에 처음 만들고 네덜란드인들이 그 후 1663년에 다시 쌓은 성채의 요새 안에 그들이 만든 교회, 도서관 등 건물이 남아 있다. 네덜란드에 이어 이곳을 지배한 영국 식민지 시대의 건물도 물론 있다.
갈레 항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성채 언덕에는 네덜란드인들이 만든 시계탑이 우뚝 서서 오랜 역사를 웅변한다.
이처럼 갈레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에 의한 피지배의 쓰라린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지금은 끊이지 않는 관광객의 발길이 그 뒤안길을 평화로이 노닐고 있을 따름이다.
[식민지 시대 건물들]
[성채에 있는 시계탑. 자료사진]
[갈레 법원]
날씨가 더워 자유시간을 다 못 채우고 호텔로 돌아와 근처 상점으로 차와 모자를 사러 가려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더위를 식힌 것까지는 좋았으나 당황할 밖에. 그래도 바질루르와 므즐레나 홍차를 비교적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어 비 맞은 값을 했다.
오후 5시 40분에 일행이 다 모여 툭툭을 타고 시내 관광을 나섰다. 이미 자유시간에 본 곳도 있고, 법원 건물이나 쇼핑센터처럼 처음 보는 곳도 있었다. 그나저나 자유시간과 시내관광 시간에 둘러본 갈레의 인상은 기대에 못 미쳤다. 유명한 역사관광지라는 말을 사전에 너무 들었던 탓이려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설상가상으로 저녁 7시에 들어간 호텔 식당(뷔페식)은 준비가 덜 된데다 음식마저 부실했다.
저녁 식사 후 촌부는 문상흡 교수님 부부와 스리랑카의 마지막 밤을 보내는 환담을 나누다 방으로 돌아왔는데, 그 사이 스파를 다녀온 집사람 이야기가 시설이나 서비스가 신통치 않았다고 한다. 고풍스런 호텔의 나무가 우거진 정원만이 이래저래 돋보이는 밤이다.
2010. 1. 19.(갈레-->콜롬보-->인천공항)
스리랑카, 아니 이번 여행에서의 마지막을 맞는 날이다.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났는데, 벌써 기온이 25도이다. 7시 30분에 시사를 하러 식당으로 가니 종업원이 빵, 오믈렛, 오트밀을 가져다준다. 고맙기는 한데 한 가지 음식을 먹고 다음까지의 시간이 너무 벌어진다.
시원한 산악지대의 호텔들과 달리 더운 지방의 호텔이다 보니 직원들의 행동도 느려지나보다. 하긴 그들이 무슨 급할 일이 있으랴. 성미 급한 동방 나그네들이나 서두를 따름이다.
호텔 정문 앞에 바질루르 홍차 전문매장이 있어 가보니까 문이 닫혀 있다. 9시가 되어야 문을 연다고 한다. 9시에는 콜롬보를 향해 버스가 떠나는데...
이재(理財)에 밝은 사람들이라면 호텔에 투숙하는 관광객들을 위해 상점 문을 보다 일찍 열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갈레를 떠난 버스가 30여분 만에 4차선 고속도로로 진입한다. 스리랑카 와서 처음 보는 고속도로이다. 남인도의 그것과는 달리 명실상부한 고속도로다. 스리랑카에 있는 유일한 고속도로이기도 하다.
[고속도로]
10시 50분 콜롬보 시내로 접어들자 커다란 호수가 나타났다. 그 호수 가운데에 국회의사당이 있다. 마치 한국의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연상케 한다. 국회의원의 숫자는 225명이라고 한다.
이 나라 국회는 진정한 민의의 전당일까, 아니면 정쟁으로 지새는 이전투구의 마당일까. 괜한 생각을 했다가 머리를 흔들어 떨쳐버렸다.
[국회의사당]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스리랑카의 행정수도는 정확히는 콜롬보 동쪽 15km에 있는 코테<Kotte>이다)는 시내가 비교적 깨끗하게 정돈된 모습이다.
콜롬보에서 먼저 찾은 곳은 강가라마야 사원(Gangaramaya Temple)과 시마말라카 사원. 도심에 있는 인공호수인 베이라 호수(Beira Lake)를 끼고, 전자는 그 부근에 있고, 후자는 아예 호수 안에 떠 있다.
강가라마야 사원의 ‘강가라마야’는 ‘물을 다스리는 왕’이란 뜻이다. 이 사원은 스리랑카 불교 재건운동을 이끈 '히카두웨 스리 나야카(Hikkaduwe Sri Nayaka)' 스님이 1885년에 세웠는데, 당시 기독교 문명의 탄압으로 꺼져가던 불교를 되살리는 중심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비록 창건된 역사는 일천하지만, 지금은 콜롬보에서 제일 크고 성스러운 사원으로 ‘서울의 조계사’ 같은 곳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관광객은 말할 것도 없고, 흰옷을 입은 순례자들로 늘 붐비는데, 이날은 학생들이 단체로 견학이나 수학여행을 온 듯한 광경도 눈에 띄었다. 이 사원도 들어가려면 당연히 신을 벗어야 한다.
[강가라마야 사원의 입구 및 순례자들]
사원이 도심 한복판에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사원 건물을 빼면 빈 공간이 거의 없어 답답한 느낌이다. 이제껏 보아온 다른 불교 유적지들과는 영 다르다. 그 대신 사원 안에는 볼거리가 매우 풍부하여 마치 박물관 같다.
미얀마 불교의 영향을 받은 황금빛이나 화려한 색상의 불상들이 많은데, 그 밖에도 세계 각국의 불상들을 모아놓는가 하면(한국에서 온 불상도 증서와 함께 전시되어 있다), 공간마다 진열장을 만들어 온갖 작은 불상, 경전, 조각품, 역대 스님들 사진 등을 전시하여 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전시물 중에는 힌두교의 가네샤 신도 있고, 심지어 삼국지의 관우상도 있다. 이래저래 다소 어수선한 느낌이 없지 않다.
[한국에서 온 불상]
한국의 대웅전에 해당하는 큰 법당에 들어가니 정면에 있는 커다란 좌불 앞에서 스님 한 분이 갓난아기를 축복하는 의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갓난아기는 강보에 싸서 땅바닥에 누이고 스님이 흰 실로 아기를 연결한 실타래를 들고 염불하는 모습이 아이의 무병장수를 빌어주는 듯했다. 그리고 아이의 부모는 아이를 둘러싸고 두 손을 합장한 채 기도하고 있었다. 부디 건강하게 잘 자라라고 나그네도 빌어 주었다.
[큰 법당과 갓난아기 축복식]
강가라마야 사원을 나오니 어느덧 12시다. 배가 고플 때도 되었지만 지척에 있는 시마 말라카 사원(Seema Malaka Temple)을 마저 보기로 했다.
전술한 대로 이 사원은 베이라 호수 안에 있다. 그래서 이곳을 방문하려면 호숫가에서 부교를 건너야 한다. 승려들이 거주하지 않아 예불은 하지 않고, 명상과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이용된다고 한다. 사원의 위치도 특이하지만, 건물 사면에 돌아가며 불상을 배치한 모습도 이채롭다. 호수 건너로 보이는 콜롬보 중심가의 고층건물군이 발전 도상의 콜롬보를 상징하는 듯하다.
[시마 말라카 사원의 모습]
[사원에서 바라본 콜롬보 도심]
두 사원을 보았으니 이젠 민생고를 해결할 시간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식당 ‘경복궁’에 도착한 것이 12시 20분이다. 이번 여정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접하는 한식당이다. 삼겹살, 김치찌개, 제육볶음, 상추, 김치... 하나 하나가 어찌 그리도 맛이 있던지, 모처럼 포식을 했다.
[한식당 경복궁]
이번 여정의 마지막 탐방지인 스리랑카 국립박물관을 찾았다. 정식 명칭은 ‘콜롬보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Colombo)’이다. 영국 식민지 시대인 1877년 윌리엄 헨리 그레고리 (William Henry Gregory) 총독이 건립한 스리랑카 최초, 최대의 박물관이다. 건물 앞 정원에 그의 동상이 있다.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건물 안에는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2,500년이 넘는 유구한 스리랑카 역사를 웅변해 주는 각종 유물들이 가득 전시되어 있다. 그 밖에 자연사, 민속학, 인류학 등에 관한 다양한 자료도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전경]
전시물 중에는 불교국가답게 특히 불교 관련 불상, 불전, 조각품들이 많다. 박물관 건물의 정문을 들어서면 중앙홀 정면에서 석불좌상을 제일 먼저 대면하게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많은 불상 중에는 특이하게 시리기야의 미인도처럼 젖가슴을 드러낸 관능미 넘치는 불상의 모습도 볼 수 있다. 힌두교 신들의 조각에서 그런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데, 그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촌부가 본 불상이 힌두교의 신상인지도 모르겠다) .
그 밖에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싱할라 왕국의 위엄을 상징하는 황금으로 된 왕관과 의자가 관람객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중앙홀 정면에 있는 석불좌상]
[관능미 넘치는 불상]
[황금으로 된 왕관과 의자]
2020. 1. 19. 오후 3시, 12일간의 걸친 남인도와 스리랑카의 문화 탐방을 국립박물관에서 마감하고 콜롬보 국제공항으로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공항은 사람들로 북새통이었지만, 인도의 그것과 달리 출국절차가 여행자를 괴롭히지 않고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저녁 7시 10분 한국행 대한항공 KE474편이 이륙했다. 인천공항까지는 5,768km, 대략 7시간 정도 걸린다.
이번 여정을 마친 촌부에게 누군가가 여행을 할 만하더냐고 묻는다면 한마디로 답할 것이다.
남인도는? “글쎄”
스리랑카는? “강추!”
**추기(追記) : 이번 일정을 안전하고 쾌적하게 진행해 주신 혜초여행사의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인솔자 손동준 대리, 현지 가이드 Trishant(남인도), Chamith(스리랑카) 세분의 노고를 치하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전 일정을 함께 하신 문상흡 교수님 부부를 비롯한 동반객 여러분께도 감사드리며, 님들의 건승을 빕니다. (끝)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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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만
2020.04.24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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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민거사
2020.04.24 13:53
선배님,
감사합니다.
누옥을 찾아 어려운 걸음을 하여 주시고
늘 꼼꼼하게 검토까지 하여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건승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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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텃골
2022.08.09 20:31
이 곳 글창고를 드나들며 늘 느끼는 거지만
참 대단하세여
대단하세여.
기자도 아니고 글타고 책임을 갖고 쓰는 여행 보고서도 아니고
어케 이렇게 세세히 보고 기록할 수 있는지여.
올만에 스리랑카에 대한 추억에 젖어 봅니다.
총각시절 객기어린 추억이 많은 곳이거든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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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세한 자료를 사전 준비하고 즉시즉시 메모하느라 무진 고생 하셨을 거로 짐작되네요.
좋은 구경 잘 하고 갑니다.
민 공의 여행기는 제가 뒤쫓아갈 때 많은 도움이 됩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