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도봉산 다락능선)
2020.05.03 16:22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
외우(畏友) 구암(龜岩)대사 보시게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하략)
일찍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대이기에, 굳이 말하지 않아도 박두진 선생의 시(詩) ‘도봉’을 금새 떠올렸을 것으로 아네.
50여 년 전 까까머리의 고등학생 시절에 비록 대학입시 준비를 위해 외웠던 시(詩)이지만, 높은 산의 모습을 어쩌면 이리도 간결하면서도 실감나게 그렸을까 감탄하곤 했지.
대사도 알다시피 도봉산은 서울 근교에 있는 명산이고, 더욱이 북한산 국립공원의 일부를 이루고 있어 평소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네.
그래서 정작 위 시(詩)에서 그린 것과는 정반대인 셈이지. 시인은 가을 산을 노래했지만, 단풍으로 물든 가을 산은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가. 촌부가 작년 가을(2019. 10. 19.)에 찾았을 때도 그러하였다네.
그리고 이번에 (2020. 4. 30.) 백동, 담허와 함께 올랐을 때도 역시 상춘객들로 붐볐네.
구암,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병원에 있을 때보다 더 밝아졌다는 이야기는 백동한테 들었네. 실로 반가운 소식일세.
마음 같아서는 집으로 찾아보고 싶네만, 아직 사람 간의 접촉을 조심해야 하는 ‘코로나19’(VOVID-19)도 그렇고, 그대의 사정 또한 여의치 않을 테니 마음뿐이네. 그대가 쾌차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부디 그러기를 바라네.
병마를 속히 떨쳐내고 벗들과 함께 ‘이 산 저 산, 꽃이 피는’ 산을 다녀보세. 그대와 백동, 담허랑 함께 월출산, 오대산을 다녀온 게 엊그제 같으이. 아 참, 그러고 보니 지리산 종주도 함께 하지 않았는가.
여기서 이번에 백동, 담허랑 모처럼 함께 다녀온 도봉산 산행 이야기를 들려줌세.
[도봉산 등산지도]
대사,
빼어난 암봉들을 자랑하는 도봉산 역시 여느 산들과 마찬가지로, 주봉[主峰. 도봉산은 해발 740m의 자운봉(紫雲峰)이 주봉이네]을 중심으로 하여 이곳으로 오르는 많은 등산코스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다락능선일세.
촌부도 작년 가을에 이 산을 오르면서 처음 안 능선인데, 이 능선을 오르다 보면 박두진 시인의 위 시가 실감이 난다네. 인파가 북적이는 도봉산에서 이곳은 신기하게도 사람 구경을 하기가 힘들다는 이야기일세.
촌부가 작년에 처음 갔을 때 “아니, 도봉산에 이렇게 한적한 등산로가 있단 말인가”하고 놀랬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네.
그 이유가 무엇이겠나?
간단하다네. 등산로가 매우 험하다는 것이지. 도봉산의 수많은 등산로 중 손꼽히게 어려운 코스라네. 수시로 철제난간을 잡고 용을 써가며 바윗길을 올라야 한다네.
그래서 평소 사물의 핵심을 잘 짚는 백동이 정곡을 찌르는 한마디를 하더군.
“이 등산로는 다리만 튼튼해서는 안 되고 상체도 튼튼해야 오를 수 있다!”
그만큼 철제난간을 손에서 놓치는 순간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는 이야기일세.
[다락능선의 초입]
구암,
다락능선을 가려면 다음과 같이 하면 되네.
우선 지하철 1호선 망월사역에서 출발하여 망월사 쪽으로 난 길(원도봉계곡을 따라 난 길)을 오르다 보면 머리 위로 지나가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교각 밑에 있는 갈림길에 다다르게 되네.
이곳에서 망월사가 아닌 심원사 쪽으로 방향을 틀어 올라가면 도봉산 관리사무소와 부설 주차장이 나오고(이번에 우리는 이곳 주차장까지 담허가 운전하는 차로 갔네). 이곳을 지나면 바로 등산로가 시작되네
심원사까지는 경사가 매우 급한 포장도로를 오르다 절을 옆으로 두고 비로소 흙길의 이어지지. 역시 계속 오르막이네. 초입부터 이처럼 급경사의 길을 오르기 때문에 다락능선이 더욱 힘든 것이라네.
“뒷동산 소풍 가는 줄 알고 왔는데, 이렇게 힘든 곳을 오르다니, 완전히 낚였네그려.”
담허의 푸념일세.
이보시게, 대사,
도봉산 다락능선은 시인이 노래했듯이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 인적 끊인 곳’이긴 하지만 말일세, 그에 비례하여 산을 오르는 즐거움이 더하다네.
왜 그럴까?
그대나 우리 모두 지공(地空)선사의 반열에 오르다 보니, 이제는 왁자지껄함보다는 호젓함이 훨씬 끌리지 않는가.
죽마고우 셋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호젓하게 걷는 산길의 즐거움을 그 무엇에 비하겠나. 시간에 쫓기는 것도 아니니 힘들면 바위에 앉아서 쉬면 되고, 목 마르면 물 마시고, 출출하면 과일과 초콜렛으로 위를 달래니 이 아니 좋은가.
말 그대로 불역쾌재(不亦快哉) 아니겠는가.
[다락능선의 쉼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좋은 건, 능선 주위에 펼쳐지는 멋진 풍경이라네. 천년고찰 망월사(望月寺)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도봉산의 주요 봉우리들인 자운봉(740m), 만장봉(718m), 선인봉(708m), 신선대(726m) 등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네. 하나같이 뾰족한 암봉들이지.
이에 더하여 포대능선에 다다르면 서쪽(송추 방면)으로 오봉이, 남쪽으로 북한산의 인수봉과 백운대가, 북쪽으로 사패산이, 동쪽으로 수락산이 보인다네.
판소리 흥보가의 눈대목 중 하나인 '제비노정기(路程記)'에도, 멀리 강남에서 흥보에게 줄 박씨를 물고 날아온 제비가 한양에 도착한 후 삼각산에 올라 좌우의 지세를 살펴보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곳에도 도봉산 망월대 이야기가 나오지. 흥보제비가 이르기를,
삼각산에 올라앉아 지세를 살펴보니, 천룡(天龍)의 대원맥(大元脈)이 중령(中嶺)으로 흘러서, 금화(金化) 계산(桂山) 분개(分開)하고 도봉 망월대 솟았구나. 문물이 빈빈(彬彬)하고 풍속이 희희(熙熙)하여 만만세지금탕(萬萬歲之金湯)이라.
그러니 이런 멋진 풍광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들여 다락능선을 오르는 값을 하고도 남는다네.
[다락능선의 좌우 풍경]
구암,
다락능선은 사패산 쪽에서 자운봉으로 이어지는 포대능선과 만나 끝나게 되는데, 이 지점에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네. 힘든 다락능선을 오르느라 수고했으니 잠시 쉬어가라는 것이지.
[포대능선의 전망대]
예서 탁 트인 사위(四圍)를 둘러보면서 숨을 고른 후 내려서면 자운봉으로 향하는 Y계곡이 나온다네. 도봉산 등산로 중 최고의 난코스라네.
그래서 폐쇄될 때가 많고(촌부가 작년 가을에 왔을 때도 폐쇄되어 있었네),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일방통행을 실시한다네.
산의 등산로에 일방통행이라니, 재미있지 않나?
[Y계곡 입구]
깎아지른 바위틈(그 모양이 Y자 형태)으로 한 사람 겨우 지나갈 정도의 길을 내고 철제난간을 설치해 놓았는데, 그 난간에 매달리다시피 해서 겨우겨우 꼭대기에 오르면 이번에는 길 좌우로 천애의 낭떠러지가 기다린다네.
한 발 삐끗하는 순간 황천길이 보장되지. 아무튼 스릴 만점이라네.
[Y계곡과 그 꼭대기]
Y계곡은 자운봉의 턱 밑에서 끝나고 이어서 바로 신선대(해발 726m)로 오르게 되네. 도봉산의 주요 암봉들 중 일반 등산객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유일한 봉우리일세.
그러니 어떠했겠나. 정상에 오르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네. 명절을 앞두고 귀성열차표를 사는 서울역전도 아닌 산꼭대기에서 줄을 서서 하염없이 가다려야 하다니...
[신선대]
지난 1월 20일 첫 확진자가 나온 ‘코로나19’(VOVID-19)로 인해 전국에 걸쳐 외출 자제와 사회적 거리 두기가 두 달여 지속되다 보니 사람들이 지쳐버렸지.
그런데 마침 30일이 부처님 오신 날(법요식은 5월 30일로 연기)로 공휴일이었고, 코로나19도 진정되어 해외입국자 외에는 국내 감염자가 더이상 안 나오는 상황이 되니까, 그동안 ‘방콕’하던 사람들이 몰려나온 모양일세. 보상심리 아니겠나.
30분 넘게 줄을 서서 정상에 오르니 자운봉이 손에 잡히고, 북한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더군. 어렵게 올랐으니 여유있게 머물며 주위 경치를 감상하면 좋으련만, 촌부 뒤로 줄 서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었네.
인증샷만 남기고 서둘러 내려왔네.
[신선대 정상]
대사,
신선대에서 내려와서는 자운봉, 만장봉, 선인봉을 왼쪽에 두고 돌아 내려가는 길로 하산을 재촉했네. 대부분 돌계단 길이라 아래뫼길도 만만치는 않았네만, 다락능선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더 힘든지라 아픈 무릎을 달래가며 내려갔다네.
그렇게 아침 9시에 시작하여 7시간에 걸친 산행을 마쳤다네. 그런데 놀라운 이야기를 하나 해야겠네. 다름 아니라 백동 이야기일세.
백동은 작년 가을에 가벼운 산행을 한 이래 그동안 산에 간 일이 없었다고 하네. 더구나 산행 전날 책을 보느라 새벽 2시에 잠자리에 들었다가 6시에 일어나 길을 나선 것이라네. 그래서 출발할 때부터 내심 걱정을 많이 했네. 이제껏 이야기한 것처럼 등산로가 힘들고 험한 까닭에 중간에 낙오하는 것 아닌가 해서 말일세.
그런데 이게 웬일, 백동이 전혀 힘들어하지 않았네. 중간중간 물어보면 오히려 컨디션이 좋다고 하였네. 본인도 신기해할 정도였지.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이냐고 했더니, 백동이 한참 생각 끝에 왈,
“이틀 전에 꽤나 좋은 장어를 먹었는데, 아무래도 그 덕분 같아”
헐, 도대체 얼마나 좋은 장어를 먹었길래...
이어지는 백동의 말,
“다음에는 청계산 등산하자. 그리고 등산 후에 그 밑에 있는 장어집에 가자. 내가 살께.”
벗이여,
천중지가절(天中之佳節)인 5월이네.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게나.
그래서 백동이 사 주는 장어 먹으러 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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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7. 8. 도봉산 다락능선과 Y계곡을 세 번째 찾았다.
2020년 4월에 오른 후 3년 만이다.
폭우와 폭염이 되풀이되는 장마철이라 걱정했는데,
다행히 날씨가 종일 흐리기만 해 오히려 산행하기에는 좋았다.
7시에 전에 도봉산 입구에 도착해 아침식사를 할 만한 집을 찾다가 겨우 한 집 발견해 들어갔다.
된장찌개를 먹을 수 있어 감사할 일인데, 맙소사 밑반찬으로 나온 나물들이 다 상했다.
전에 만들어 두고 팔다 남은 것을 냉장고에 보관했다 내온 것 같은데, 너무 심했다.
그나마 된장찌개는 맛이 괜찮아 허기를 면한 것에 만족해야 했다.
주말임에도 다락능선을 따라 올라가는 길에는 나중에 포대능선을 만나기 전까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한여름의 날씨 탓이리라.
하늘이 잔뜩 흐려 카메라 셔터를 아무리 눌러도 제대로 된 사진을 찍을 수 없다.
세번째 오르는 것이건만, 촌부에게 다락능선은 여전히 험하고, Y계곡은 더욱 그렇다.
그래도 아직은 조심해서 다니지만, 언제까지 가능할지 모르겠다.
Y계곡 입구에 노약자,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 심장이 약한 사람은 가지 말라는 경고판이 세워져 있는 게 새삼 눈에 들어온다.
3년전 신선대는 30분 줄을 서서 기다려야 오를 수 있었는데, 이날은 그럴 일이 없다.
다만 아쉽게도 사진의 뒷 배경이 되어 주어야 할 북한산은 실종되고 회색 구름만이 객을 맞이한다.
하산길에는 처음으로 석굴암에 들렀다.
거대한 바위 밑에 있는 굴(천연인지 인공인지 모르겠다)에 작은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