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
2023.03.26 00:15
1
[장면1]
1895년 10월 8일.
일본인들이 경복궁의 건청궁(乾淸宮) 안에 있는 곤녕합(坤寧閤)에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무참히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명성황후는 여흥민씨(驪興閔氏) 제27세손이다. 촌부는 제31세손이다. 민씨는 여흥민씨 단본(單本)이고, 여흥은 여주의 옛이름이다.
촌부의 생가는 명성황후의 생가로부터 12km 떨어져 있다. 그래서 여주에 갈 때면 종종 명성황후의 생가로 발길이 향해지곤 한다. 지난 주말(3월 18일)에도 둘러보았다.
명성황후의 생가에 갈 때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촌부의 집에는 명성황후가 촌부의 증조할머니에게 하사한 장롱이 있다. 이 장롱은 지금도 잘 사용하고 있다.
[명성황후 생가]
[장면2]
촌부는 타고난 역마살로 인해 지구촌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닌다.
해외여행에 나서는 사람들이 흔히들 가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나, 미국,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남미, 대양주, 아프리카까지 참으로 많은 곳을 다녔다.
단순 관광 여행도 하지만, 히말라야, 알프스, 로키산맥, 천산산맥, 파타고니아, 밀포드, 키나발루 등 높고 험한 산을 오르는 트레킹도 한다.
그동안 이처럼 세계가 좁다고 다녔고, 앞으로도 체력이 허락하는 한 계속 다닐 것이다.
[알프스에서 두번째로 높은 산인 몬테로사(해발 4,634m)를 바라보며]
그런데 예외가 있다.
바로 우리나라의 바로 이웃에 있는 일본이다.
일본 땅을 밟은 것은 1992년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 가는 길에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하여 나리타 공항에서 1시간 머물렀던 것이 유일하다. 당시 촌부는 공항에서 콜라 한 잔 사 마시지 않았다. 앞으로도 일본을 갈 계획은 없다.
이처럼 일본을 안 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장면1]의 글이 그 답이다.
[장면3]
우리나라 대통령이 3월 16일에 일본을 방문했다.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에 대한 일본 기업들(미쓰비시중공업 등)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2012년의 대법원판결(2018년 최종적으로 확정)을 계기로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경색 국면을 돌파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앞서 3월 6일 정부는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설립된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지원재단’이라 한다)의 기금으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 판결금을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즉 가해자인 일본 기업들을 대신하여 지원재단의 돈으로 변제하겠다는 것이다(이른바 ‘제3자 변제’).
[제3자 변제 방안을 발표하는 외교부 장관]
당초 일본 기업들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대법원판결은 어디까지나 법률적인 차원의 접근이었고, 그 판결에 따르는 눈에 보이는 파장을 수습하고 해결하는 것은 정치·외교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정치권은 해결의 몫을 다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반일 선동에 이용한다는 의심을 살 정도로 방치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냉엄한 현실에는 애써 눈감고 외면했다.
그 사이 북한의 미사일과 핵 위협은 나날이 더욱 거세졌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신냉전구도가 공고해짐에 따라, 향후 발생 가능한 한반도와 대만해협의 위기에 한미일 세 나라 간 군사 공조와 경제·안보 협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일관계의 개선과 그에 따른 한미일 공조 회복이 무엇보다 긴요하다는 것이 정부의 인식이다. 그리고 그 돌파구를 찾기 위해 고심 끝에 내놓은 해법이 바로 제3자 변제이다.
“한일청구권협정과 대법원판결의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라는 표현(2023. 4. 20. 자 문화일보 사설)이 이를 한마디로 대변한다.
이러한 제3자 변제가 옳으냐 그르냐를 놓고 정치권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국내 여론은 찬반으로 갈리고, 야권에서는 극렬한 반대 운동을 펼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우리 정부가 강제징용에 관한 해법으로 제3자 변제를 발표한 지 1시간 여 만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환영 성명을 발표할 정도로 국제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정부가 내놓은 제3자 변제 방안의 당부는 궁극적으로 후세의 사가(史家)들이 판단할 일이고, 촌부는 이를 논할 위치에 있지도 않고, 그럴 의사도 능력도 없다. 오히려 [장면1][장면2]에서 보듯이 일본은 촌부에게는 여전히 머나먼 나라이다.
다만, 반대론의 논거 중 하나로 제기되는 주장, 즉 ‘피해자가 반대하는 이상 제3자 변제는 위법하다’는 주장에 관하여는 순수 법률적인 관점에서 그 당부에 관심이 간다. 제3자 변제는 과연 위법한가?
2
우리 민법 제469조는
제1항에서 “채무의 변제는 제3자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채무의 성질 또는 당사자의 의사표시로 제3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라고 규정하고 있고,
제2항에서 “이해관계 없는 제3자는 채무자의 의사에 반하여 변제하지 못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의 내용을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돈을 주고받아야 하는 채권·채무 관계에서 채권자의 입장에서는 돈만 받으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고, 그 돈에 꼬리표가 붙어 있는 것도 아니니 그 돈이 꼭 채무자의 돈일 필요는 없다. 그러니 채무자가 아닌 제3자가 대신 갚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래서 민법 제469조 제1항도 첫머리에서 “채무의 변제는 제3자도 할 수 있다.”는 원칙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민법은 이러한 원칙에 세 가지 예외를 두고 있다.
첫째, 채무의 성질이 제3자 변제를 허용하지 않는 경우이다(민법 제469조 제1항 단서).
이는 예컨대 학자의 강연이나 명배우의 연기 같이 채무자 본인만이 이행할 수 있는 채무에 관한 것인바, 돈을 주고받는 채무를 다루는 이 글에서는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둘째, 채권자와 채무자가 합의하여 제3자 변제를 금지한 경우이다(민법 제469조 제1항 단서).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서, 채권자는 채무자가 주는 돈만 받고 제3자가 주는 돈은 받지 않기로 합의가 이루어진 경우에는, 그 합의에 따라 제3자는 채무자 대신 변제를 할 수 없다.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 굳이 그런 합의를 하였는데 이를 부정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법도 그런 합의의 유효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셋째, 채무자와 아무런 이해관계 없는 제3자가 채무자 대신 변제하는 것을 채무자가 반대하는 경우이다(민법 제469조 제2항).
본래 채무를 갚아야 하는 채무자의 입장에서는 남이 대신 채무를 갚아주겠다니 고마운 일이긴 한데, 경우에 따라서는 그게 꼭 고맙기만 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돈을 대신 갚아 준 제3자가 그 후 그 돈을 자기에게 되갚으라고 요구하면(이른바 ‘구상권 행사’) 채무자로서는 그에 응해야 하고, 결국 어차피 돈을 갚아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셈인데, 그 제3자가 악덕 고리대금업자처럼 본래의 채권자보다 가혹한 사람이라면 돈을 대신 갚아주는 게 반갑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채무자가 반대하면 제3자 변제가 허용되지 않는다.
이상에서 본 세 가지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 민법은 제3자 변제를 허용하고 있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채권자와 채무자가 합의하여 제3자 변제를 금지하거나,
그런 합의 없더라도 채무자가 제3자 변제를 반대하는 경우에는 제3자 변제가 불가능하다.
반면에, 채무자와는 달리 채권자가 제3자 변제를 금지하는 것은 우리 민법이 제3자 변제의 불허사유로 삼고 있지 않다. 따라서 채권자가 반대하더라도 제3자 변제가 가능하다.
3
여기서 강제징용의 손해배상에 관한 제3자 변제 문제로 돌아가 보자.
이제까지 손해배상채권자인 피해자들과 채무자인 일본 기업들 사이에 지원재단의 제3자 변제를 금지하는 합의를 한 적이 없다. 그리고 채무자인 일본 기업이 지원재단의 제3자 변제를 반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민법상의 원칙으로 돌아가 지원재단의 제3자 변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반대론자의 주장처럼 피해자들이 반대하기 때문에 제3자 변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다.
만일 피해자가 지원재단의 돈을 받기를 끝내 거절한다면 어떤가.
이 경우 지원재단은 손해배상금을 공탁할 수 있다. 우리 민법은 채권자가 돈을 변제받기를 거부하는 경우에는 그 돈을 공탁함으로써 채무를 면할 수 있게 하고 있다(민법 제487조). 공탁이란 법에서 정하고 있는 국가기관(=공탁소)에 돈을 맡기는 것을 말한다.
한편, 지원재단의 제3자 변제가 대법원판결의 취지에도 반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러나 이 역시 잘못된 주장이다.
대법원판결의 당부는 차치하고, 판결의 핵심은 일본 기업들이 강제징용에 대하여 손해배상책임이 있다는 것일 뿐이다. 일본 기업들에 대해 사죄를 명한 것도 아니다(법상 명할 수도 없다). 손해배상금을 일본 기업들이 직접 주든, 지원재단이 제3자 변제를 하든 그것은 대법원판결이 다룰 일이 아니고, 다룰 수도 없다.
오히려 지원재단의 제3자 변제는 일본 기업들의 손해배상책임이 인정됨을 전제로 하는 것인 만큼, 그것이 대법원판결의 취지에 반한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지원재단의 제3자 변제가 위법하다거나 대법원판결의 취지에 반한다는 주장은 법적으로 설득력이 없다.
제3자 변제의 당부를 정치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은 어차피 정책 선택의 문제이므로 촌부가 왈가왈부할 일이 못 되지만, 적어도 이를 법률적인 측면에서 왜곡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정치적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적법을 위법으로 몰아가는 것은, 위법을 적법으로 치장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 그러다가는 법치주의가 설 땅을 잃게 된다.
이 글의 첫머리 [장면1][장면2]에서 언급한 것처럼 촌부에게 일본은 머나먼 나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촌부 개인의 내면의 문제일 뿐이다. 법의 영역은 심정(心情)의 영역과 별개이다.
경색된 한일관계의 개선을 절실히 바라는 마음은 촌부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목하 세계정세의 흐름 속에 위치하는 우리나라의 상황이 결코 녹록치 않기에 더욱 그러하다.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이든, 뒤엉킨 삼실타래(亂麻)이든, 이제는 속히 끊어야 할 때이다.
10. If I leave - clean & white.mp3
(명성황후 OST)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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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sy
2023.03.26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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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민거사
2023.03.26 11:12
별 말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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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텃골
2023.03.26 13:50
정치나 법에 대해선 모르지만
일본이나 중국 또는 미국을 민족 감정이나 정서에 상관않고 제주도 보다 오히려 더 자주 다니는 저에게
소위 애국자들께서 왜 하필 일본에 가냐?는 눈치를 안 주게 죽창 좀 거두어 들였으면 좋겠어여.
젊은 시절 해외에서 걸뱅이 처럼 살았는데
저에게 작으나마 도움을 주고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은 한국인들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많았었구요.
용서는 당한자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친일.친미.친중 등등
누군가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 자랑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 중국에도
일본에도 친한 친구들이 꽤 있거든여. -
우민거사
2023.03.26 15:35
맞습니다.
이제는 대한국민이 당당해져야 합니다.
눈치 보지 말고 어깨 펴고 자랑스럽게 다니십시오.
김교수님은 세계 속의 자유인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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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텃골
2023.03.27 05:11
어떤 시인의 시귀가 떠 오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은
남의 결점을 찾아 내는 것이며
가장 좋은 선물은 용서라고여."
살면서 남의 결점 찾아 낼 만큼 똑똑하지도 않고
남을 용서를 할만한 일도 없는 맹한 삶을 살아 온
저로선 정치인들의 민족이나 애국
또는 정의에 대한
거대담론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겠더라고여.
그냥 지금처럼 내가 못하고 못가는 것들
남들 것으로 대리만족 하기도 하고
그들을 따라 나도 흉내내며 자족감도 느끼는 ..
그런 영혼없이도 즐거운 삶에
찬물을 끼엊는 지사들 좀 안 봤으면 좋겠어여.
ㅎㅎㅎㅎㅎ
법관님의 동화같은 새벽 산책 길 도깨비들 모습
참 좋아여. -
우민거사
2023.03.27 10:11
해가 일찍 뜨고 밤이 짧아진 탓인지 요샌 새벽 도깨비들이 다 도망가 안 보이는구먼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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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
2023.03.28 23:03
이 글을 쓰시면서,
얼마나 무겁게 펜을 잡으셨을지 헤아려봅니다. -
우민거사
2023.03.29 10:39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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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텃골
2024.11.24 08:29
우리나라 황실 피를 지니고 계신 가문의 자손으로
한국의 법맥을 지키고 계신 법관님의 그 꼿꼿한 선비의 모습에 고개가 숙여 집니다.
법은 모르지만
진정한 이나라의 올곧은 선비의 모습을 다시 봅니다.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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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자변제에 관한 법률강의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