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화봉접(探花蜂蝶)인들 지는 꽃을 어이하리
2024.05.25 23:53
닷새 전에 소만(小滿)이 지났다.
한마디로 말해 여름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이미 지난 4월에 벌써 ‘푸른 4월’을 노래했지만, 소만이 지나면서 명실공히 ‘여름’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다가왔다.
산하(山下)는 이미 신록(新綠)의 파릇파릇함을 벗고 짙은 녹음(綠陰)의 단계에 이르렀다. 판소리 단가 ‘사철가’에 나오는 대로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가 된 것이다.
농촌에서는 이즈음이 되면 모내기에 바쁘다.
금당천변의 논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미 모내기를 한 논이 아직 안 한 논보다 더 많이 눈에 띈다. 요새는 예전처럼 사람들이 줄을 서서 모를 내는 것이 아니라 이앙기(移秧機=모내기기계)를 이용하기 때문에 농부 혼자도 할 수 있으며, 그런데도 시간은 예전보다 훨씬 덜 걸린다.
아무튼 연한 모들이 줄지어 심어진 논의 정경이 아름답다.
뚝방길을 걸으며 그 모습을 무심코 바라보는데 논 속에 잠겨 있는 산에 눈이 크게 떠진다.
아니 저 산이 왜 저기에?
노안(老眼)이 놀라거늘 허리 굽혀 살펴보니
금수청산(錦繡靑山)이 논 속에 잠겼에라
아서라 놀라지 마라 이를 보려 하노라
한양에서 낮에 일을 보고 오느라 금당천을 찾은 발걸음이 늦어졌다.
모를 냈거나 내고 있는 평화로운 들판을 비추던 해가 어느새 서산 위로 뉘엿뉘엿 넘어가려 한다.
촌노의 마음이야 이 목가적인 풍광을 더 즐기며 미음완보(微吟緩步)하고 싶지만 지는 해를 어쩌랴.
아무리 여름이 왔다 해도 해는 뜨고 지게 마련 아니던가.
그게 조물주의 조화이고 대자연의 섭리다.
인간으로서는 거스를 수 없고, 그럼에도 거스르려 하다가는 정작 거스르지도 못하고 화만 입을 뿐이다.
무릇 중생이 모두 이런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면서 살아간다면 세상에 무슨 풍파가 있으랴.
그런데,
나라 밖에서는 도대체 합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전쟁이 두 군데서 벌어지고 있고,
나라 안에서는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여건으로 인해 민생이 날로 피폐해지고 있건만,
이는 나 몰라라 한 채 그저 탐진치(貪瞋癡)에 눈이 멀어,
총선에서 참패한 여당은 누구나 다 아는 참패원인을 백서에 담지 못한 채 대통령의 눈치나 살피고,
반대로 압승한 야당은 벌써부터 입법폭주 시즌2를 예고하며 길거리로 나선다.
‘연금이 어떻고, 인사가 어떻고, 원(院) 구성이 어떻고, 특검이 어떻고, 탄핵이 어떻고,...’
정쟁(政爭)으로 날을 지새우는 위정자(僞政者)들에게는
‘해가 뜨면 지게 마련’이라는 자연의 섭리가 완전 다른 나라 이야기인 듯하다.
그러다가 역풍(逆風)이 불면 어쩌랴 싶지만, 그런 건 아예 관심 밖인 모양이다.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詩)가 있다. 조선 중기의 대쪽 같았던 정승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의 시조를 일부 고쳐 읊어본다.
녹양(綠楊)이 천만사(千萬絲)인들 가는 춘풍 매어 두며
탐화봉접(探花蜂蝶)인들 지는 꽃을 어이하리
아무리 권력이 중한들 민심보다 무거우랴
*녹양(綠楊) : 푸른 버들
천만사(千萬絲) : 천가닥 만가닥 되는 많은 실가지
탐화봉접(探花蜂蝶) : 꽃을 찾아 날아드는 벌과 나비
이원익의 본래 시는 마지막 행이 " 아무리 사랑이 중한들 가는 님을 어이리"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법부가 제 자리를 찾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지방법원의 민사 항소 사건이 항소 후 1년이 지나야 첫 기일이 잡혀 기가 막힌다는 소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속한 재판을 강조하는 대법원장의 목소리가 일선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분위기가 그래도 조금씩은 바뀌고 있는 것 같다는 주변의 이야기에 위안을 받는다.
8월이면 대법관 3인이 바뀐다.
임명 동의권을 쥐고 있는 국회를 거대 야당이 장악하고 있어 방향을 가늠키가 어렵지만,
부디 코드에 물든 사람이 아니라 실력과 인품이 뛰어나 선후배와 동료의 신망을 받는 사람이 제청되고 임명되어 사법부의 제 자리 찾기가 진일보하길 소망한다.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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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에 잠긴 산에 오르시려 신발을 벗으시는 건 아니겠죠?
도인의 경지세여.
도인의 시를 보니
갑자기 생각 나는 시조가 있네요.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 있던건데
누구 신지는 모르겠네요.
믈아래 그림재 지니 다리 우해 중이 간다.
저 중아 게 있거라. 너 가난데 물어 보자
막대로 흰구름 가라치고 돌아 아니 보고 가노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