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무엇을 버릴테냐[상강(霜降의 단상]
2024.10.26 23:16
사흘 전(10월 23일)이 상강(霜降)이었다.
글자대로라면 서리가 내렸어야 하지만, 그렇지는 않고 대신 가는 빗방울이 이따금 듣는 가운데 아침 기온이 10도 아래로 뚝 떨어져 새벽 산책길의 촌부를 잔뜩 움츠리게 했다. 어지간히도 늦게까지 기승을 부린 더위가 물러가고 마침내 가을이 오나 싶었는데, 벌써 지나가 버리고 겨울 문턱이라니...
촌부가 아무리 아쉬워한들 가고 오는 세월을 어찌할까마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고로 고진감래(苦盡甘來)라 하였으니 긴 여름 내내 그렇게 고생을 시켰으면 덥지도 춥지도 않은 화창한 날씨를 한동안 즐기게 해 줄 수도 있으련만,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갑자기 추위를 불러와 안겨줄 건 무언가. 참으로 야속하다.
하긴 곧 입동(立冬)이 다가오는 상강(霜降)의 계절인데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 서리가 오지 않은 것만도 감지덕지할 일이지 무슨 불평이 그리 많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이제 머지않아 곧 그 서리가 내리면 산천의 모습이 확 바뀔 것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 권문해(權文海. 1534~1591)는 상강(霜降)이라는 시에서 그 모습을
“한밤중에 된서리가 사방에 두루 내리니(半夜嚴霜遍八紘. 반야엄상편팔굉),
천지가 단번에 맑아져 숙연하다(肅然天地一番淸. 숙연천지일번청)”
고 그렸다.
시인은 이어서 말한다.
“바라보이는 산의 모습이 점점 파리해지고(望中漸覺山容瘦. 망중점각산용수),
추위에 놀란 기러기가 구름 너머로 가로질러 간다(雲外初驚雁陳橫. 운외초경안진횡)”
그렇다.
무더운 여름을 장식했던 푸르름도, 무르익은 오곡이 연출했던 황금벌판도, 시곗바늘이 상강을 지나 입동을 향해 달려갈 즈음에는 어느 날 밤새 내린 흰 서리에 덮여 파리해질 것이다. 풍상(風霜)이 섞어칠수록 오상고절(傲霜孤節)하는 국화만 단지 예외일 뿐이다.
그런데, 여름 내내 자기 몸에 잔뜩 걸치고 달고 있던 잎을 이즈음 다 떨구는 나무들은 할 말이 있다. 이제껏 묵묵히 다물고 있던 입을 열고 말한다. 어느 시인의 입을 빌려 그 말을 들어보자.
나무도 할 말이 있을 때가 있다
평생 입 꼭 다물고 답답히 살 수 있으랴!
그래서 가을이 오면 어김없이 하는 말
나는 내 열매와 잎을 버릴 테니
너는 무엇을 버릴 테냐?
(곽진구의 시 ‘상강 즈음’에서)
나무는, 아니 나뭇잎은 자기 할 일을 다한 후에 나무를 보호하고 뿌리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버린다. 그 덕에 나무는 이듬해에 다시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요한복음의 구절도 일맥상통힌다.
이 시를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입만 열면 백성을 위한다고 외쳐대는 위정자들은 정녕 백성을 위해 무엇을 버릴까. 아니 버릴 게 있기나 할까. 설사 있다고 해도 버릴 수 있을까.
그들이 사이비 ‘僞政者’가 아니라 진정한 ‘爲政者’라면, 그래서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편안을 생각한다면, 이를 위해 무엇인들 못 버리랴.
이것이 한낱 촌부의 헛된 바램이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마치 오상고절(傲霜孤節)인 양 행세하지만 실제로는 버리지 못해 변비에 걸린 ‘僞政者’들 때문에 백성만 얼굴이 노래지는 일은 없어야 하는데...
[김명민의 클래식 마에스트로 - V.A.] 드보르작: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1악장.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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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위정자때문에 백성들 얼굴에 빨갛게 또 노랗게 단풍이 드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