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어 한 마리가 헤엄치고

 

   단군 할아버지가 이 땅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신 후 4357번째 맞이하는 ‘하늘(天)이 열린(開) 날’에 연산회의 정기산행으로 춘천 삼악산(三岳山)을 다녀왔다. 초임 판사 시절이던 1984년 가을에 다녀온 후 꼭 40년 만이다.     

 

   삼악산은 경춘국도의 의암댐 바로 서쪽에 있는 산이다. 남한에서 10번째로 높은 산이자 경기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화악산(華岳山. 1,468m)의 지맥이 남동쪽으로 뻗어 오다 북한강과 마주치는 곳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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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악산의 높이는 654m이고 주봉(主峰)은 용화봉인데, 용화봉과 함께 청운봉(546m), 등선봉(632m) 등 3개의 험한 봉우리가 산을 이뤄 삼악산(三岳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주봉의 높이가 말해주듯 산의 규모가 크거나 웅장하지는 않지만, 의암호와 춘천시를 조망하는 경관이 수려한 데다 등선폭포의 비경이 더해져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한편 산의 규모에 비해 산세가 험준한 까닭에 능선 여기저기에 삼국시대 이전 맥국(貊國)의 성터(삼악산성. 三岳山城) 또는 후삼국의 궁예가 쌓은 것이라고 전해지는 대궐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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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악산의 주된 등산코스는 의암매표소에서 시작하여 용화봉 정상에 오른 후(1.95km) 등선폭포를 거쳐 등선매표소로 하산하는 것(3.2km)과 그 역으로 진행하는 방법도 있다.

 

    무릇 등산은 험하게 올라가서 편하게 내려가는 것이 정석이다, 그래야 무릎에 부담이 덜 가고 그만큼 힘이 덜 든다. 삼악산 등산코스는 전자가 이에 해당한다. 후자의 역방향 코스를 택했다가는 하산 시에 무릎 통증과 위험을 감내해야 한다. 촌부 일행이 전자의 코스를 택한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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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역에서 ITX 열차를 타고 남춘천역에서 내려 택시로 의암매표소에 도착하니 오전 10시다. 푸른 하늘과 푸른 물이 객을 맞는다. 더 바랄 게 없을 만큼 좋은 날씨가 멋진 등산을 예고하는 가운데, 곧바로 산행을 시작했다.

 

    본래 입장료가 2,000원인데, 이날은 하늘이 열린 날로 국경일이라고 면제해 주었다. 단군할아버지의 덕을 이곳에서 볼 줄은 미처 몰랐다. 사실 촌부는 어쩔 수 없는 지공선사인지라 굳이 국경일이 아니어도 입장료 면제의 혜택을 받지만, 다른 일행은 오로지 개천절 덕을 본 것이다.

 

삼악산3.jpg[의암매표소 입구]  

 

    등산로는 아예 시작부터 계단이다. 상원사까지 올라가는 600m의 돌길 등산로가 만만치 않은데, 동행한 박영극님이 아직은 쉬운 길이란다. 앞으로 어떤 길이 기다리고 있길래... 

 

    정비된 돌길을 30분 정도 올라 숨이 가빠지려고 할 즈음에 아담한 절이 나타났다. 상원사(上院寺)이다. 신라시대 창건되었다고 하나 기록이 없어 구체적인 내용을 알 길이 없고, 6·25 전쟁 때 절이 불탄 후 현재의 법당 대웅전은 1984년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법당 안에서 스님 한 분이 신도들과 천수경을 독송하고 계신다. 안에 들어가 부처님께 무사 산행을 빌까 하다가 방해가 될 것 같아 밖에서 기도를 하는 데 그쳤다.  

 

삼악산4.jpg[상원사]

 

   상원사를 지나고 나면 경사가 급한 깔딱고개가 시작되고 돌길도 이제까지와는 달리 자유분방하다. 가쁜 숨을 몰아치며 400m 정도 오르자 깔딱고개 마루턱이다. 한숨 돌리는 곳이다.

   그런데 깔딱고개를 다 올랐으니 앞으로는 평탄하겠구나 하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오봉산 용화봉의 험한 등산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지금까지는 맛보기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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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깔딱고개부터 정상까지의 등산로는 대부분이 암릉에다 급경사이다.

   이런 길을 오르려면 일단 등산스틱은 접어서 도로 배낭에 넣고, 길에 설치된 쇠줄을 잡거나, 바위를 잡거나, 심지어 나무뿌리도 잡으면서 두 손 두 발을 다 동원하여야 한다. 당연히 양손에 장갑을 껴야 한다.

    이 암릉길은 도봉산 Y계곡, 관악산 육봉능선, 북한산 문수봉에서 승가봉 쪽으로 내려가는 길 등과 난형난제이다. 

 

삼악산5.JPG[암릉]

   

   우리 일행과는 반대로 위쪽에서 내려오던 등산 초보자들로 보이는 젊은 남녀 한 쌍이 비명을 지른다. 

 

   “아니 여길 어떻게 올라오고 계세요? 깔딱고개까지 얼마나 더 내려가야 해요?” 

   “그러게요. 힘드네요. 깔딱고개까지 그리 멀지는 않지만. 조심해서 내려가세요.”

 

   등산 초보자는 멋진 전망을 포기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 길을 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길은 이처럼 오르기가 힘든 대신 흘린 땀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한다. 한 발 한 발 오를수록 의암호와 춘천 시내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정상을 앞두고 100m 전에 설치되어 있는 전망대에 오르면 그 경치가 절정에 다다른다.

  유난히 푸른 하늘과 흰 구름 아래 펼쳐진 풍경이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다. 앞서 말한 화악산(華岳山)도 멀리 보인다. 

 

   그 그림 호수 속에서 살찐 붕어 한 마리가 헤엄을 치고 있다. 이름하여 ‘붕어섬’이다. 그 등이 온통 반짝인다. 자세히 보니 태양광 패널이 섬 전체를 덮고 있다. 태양열을 이용하여 전기를 생산하는 것은 좋은데, 저렇게 섬 전체를 덮었어야 하는지...

   그 바람에 그 위로 지나가는 케이블카(2021. 10. 8. 개통했다. 총길이 3.61km로 국내 최장이다)가 연출하는 풍경이 다소 빛이 바래는 느낌이다. 객지인 한양에서 온 나그네의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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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악산7.jpg[전망대에서 본 풍경]

 

   전망대를 지나 100m 더 올라가면 나오는 용화봉 정상(=동시에 삼악산 정상이다)은 협소하고 무미하다. 나무에 가려 주위 풍광도 제대로 안 보인다.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만 붐빈다. 오래 머물 만한 장소도 아니고 그럴 가치도 없어 곧바로 등산폭포 쪽의 하산길로 향했다.  

 

삼악산10.jpg[삼악산 정상]

 

   정상에서 등선폭포 쪽으로 300m 내려가면 ‘큰 초원’이 나오고, 다시 500m 내려가면 ‘작은 초원’이 나온다. 두 곳 모두 쉼터를 조성해 놓았다.

   삼악산이 바위산이라 등산로의 대부분이 돌길 아니면 암릉인 까닭에, 어쩌다 자그마한 풀밭이 나오면 초원이라 이름 짓고, 그중에서 큰 것은 ‘큰초원’, 작은 것은 ‘작은 초원’이라고 이름 지은 듯하다. 

 

   만일 촌부의 추측대로 실제로 그런 것이라면, 그 흥미로운 발상과 소박한 이름이 참으로 정겹다. 아무튼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래서 이왕이면 큰 초원에서 자리를 펴고 점심식사를 했다. 어느새 오후 1시가 다 된 것이다. 

   박용석님과 김경숙님이 당신들은 힘들다고 산 아래에서 머물면서 산행 중에 먹으라고 개별포장으로 싸 준 먹거리들이 꿀맛이다. 새삼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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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선폭포 쪽 등산로는 경사가 급하지 않고 평이하다. 큰 초원과 작은 초원 사이에 흔히 ‘공포의 333계단’으로 불리는 돌계단이 있지만, 정비가 잘 되어 있어 걷는 데 어려움이 없다. 

 

   작은 초원을 지나 10여 분 내려가면, 건립 연대를 알 수는 없으나 실로 오랜 세월 풍파를 견디며 지내왔을 것으로 보이는 3층 석탑이 외롭게 서서 객을 맞는다. 산속의 작은 절 흥국사(興國寺)에 도착한 것이다. 

   전술한 대로 삼악산에는 맥국(貊國)의 성터(삼악산성. 三岳山城) 또는 후삼국의 궁예가 쌓은 것이라고 전해지는 대궐터의 흔적이 남아 있는바, 흥국사는 그 대궐 안에 있던 절이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전란으로 여러 번 불에 탔는데, 1985년에 현재의 대웅전 건물을 중창하였다.

    대웅전 앞에 있는 또 다른 3층 석탑은 대웅전 중창 시에 함께 건립하였는지 아직 역사의 이끼가 끼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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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악산14.jpg[흥국사 3층 석탑과 대웅전]

 

   절 내의 건물이래야 이 법당과 허름한 요사채 하나뿐이어서일까 ‘절간 같이 조용한 절’인 흥국사를 뒤로하고 하산길을 재촉하는데, 태풍이라도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움막집 하나가 시선을 끈다. 

  입구에 ‘三岳山 운파산막’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냉막걸리, 커피, 냉온 꿀차 등을 판다는 차림표도 씌어 있다.

 

삼악산15.jpg[운파산막]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못 되는 깊은 산속에 있는 이 움막의 정체가 궁금해서 자세히 보니까 벽에 내력이 씌어 있다. 

 

   본래 오대산 노인봉의 산장지기였던 ‘성량수’라는 분이 노인봉에서 내려와 여러 곳을 전전하다 이곳에서 산막을 짓고 노년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젊어서는 백두대간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는데, 북한산에서 인명구조 활동을 하다 추락하여 중상을 입은 후로 더 이상 산을 오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안전 산행”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화두(話頭) 아닐까.

 

   산막 내부를 힐끗 들여다보니 그 주인공으로 보이는 털보 한 분이 등산객 차림의 사람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안에 들어가 목을 축이고 갈까 하고 순간적으로 망설이다 시간에 쫓겨 그대로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산막을 지나면 곧 등선봉과 청운봉 올라가는 세 갈래 갈림길이 나오고, 이곳을 통과하여 20여 분 내려가면 좌우의 기암절벽 사이로 깊게 형성된 협곡을 가로지르는 아치형 다리가 나그네를 반긴다. 

   그 다리에 이어지는 철계단 등산로(이쪽 등산코스 중 경사가 급한 곳이다)에는 낙석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지붕이 설치되어 있고, 길옆으로 소리내어 떨어지는 물줄기가 크고 작은 폭포들을 이룬다. 그중 주렴폭포, 비룡폭포, 백련폭포가 눈길을 끌지만, 진짜 주인공은 등선폭포이다. 

 

   의암매표소에서 산 정상을 오를 때 볼 수 있었던 시원한 전망을 대신하는 것이 바로 이 협곡과 폭포들이다. '꿩 대신 닭인지 봉황인지'는 산객 각자의 취향과 판단에 맡길 일이다.   

 

삼악산16.jpg[협곡의 철계단과 지붕]

 

   등선폭포는 높이가 비록 10여 미터에 불과하지만, 협곡의 높은 기암절벽 사이로 떨어지는 모습이 주위 풍광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지나가는 과객의 막힌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물소리가 요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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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악산17-1.jpg[등선폭포]

 

   등선폭포가 있는 협곡을 벗어나자 좌우로 늘어선 식당들이 나그네를 향하여 손짓한다. 코를 자극하는 온갖 맛있는 냄새의 유혹을 어렵사리 뿌리치고 발걸음을 재촉하여 입구 매표소에 다다르니 어느새 시곗바늘이 오후 3시를 향해 가고 있다. 그렇게 40년 만의 삼악산 등산이 막을 내렸다. 

  

   이제 남은 것은 남춘천으로 돌아가 목욕을 하고 주린 배를 채우는 일이다. 님춘천역 부근의 ‘대한스포렉스 사우나’와 강원도 토속음식점인 ‘곰배령’이 망외(望外)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그에 더하여 귀경길 ITX 열차의 차창에 비친 삼악산의 노을은 덤으로 받은 선물이다.

 

삼악산18.jpg[저녁노을에 물든 삼악산]

 

03-비발디 - 사계 중 가을_ 알레그로.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