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심은 금물(서산 팔봉산)

2025.06.28 21:17

우민거사 조회 수:78

 

                   방심은 금물(서산 팔봉산)

 

 

   네이버에서 검색을 해보면 우리나라에 팔봉산이 9개나 있다. 어디에서건 산봉우리가 8개 있으면 그냥 팔봉산이라고 이름을 지은 모양이다. 이쯤 되면 팔봉산은 가히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라고 해도 될 판이다.

 

   아무튼 많은 팔봉산 중에서 홍천의 팔봉산이 군계일학(群鷄一鶴)으로 ‘산림청’, ‘블랙야크’, ‘월간 山’에서 모두 100대 명산의 하나로 꼽을 만큼 유명하고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다. 촌부도 일찍이 2017년 11월에 이곳을 오른 일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처럼 명산으로 꼽히는 이 산의 최고 높이가 불과 302m이다.

 

   홍천의 팔봉산만큼은 유명하지 않아도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다른 팔봉산이 있으니, 바로 서산의 팔봉산이다.

    이 산은 최고 높이가 361.5m로 해발고도가 높지는 않지만(그래도 홍천의 팔봉산보다는 높다). 서해안의 저지대에 위치하는 까닭에 상대적으로 우뚝 솟은 것처럼 보인다.

   이곳은 본래 봉우리가 9개인데 사람들이 제일 작은 봉우리는 빼고 팔봉산이라 부르자 그 작은 봉우리가 매년 12월 말이면 자기를 뺐다고 울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8개의 봉우리가 남북으로 늘어서 있고, 산의 서쪽으로는 태안반도가, 북쪽으로는 서해바다의 가로림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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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산을 6월의 첫 주말인 7일에 찾았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지난 2월 말에 안나푸르나 토롱 패스(5,416m)를 오르고, 청계산(616m)을 이따금 찾고, 주말을 제외한 주중에는 거의 매일 우면산(293m)을 걷다 보니, 서산의 팔봉산은 최고 높이가 361.5m라는 말에 가볍게 동네 뒷산을 간다는 기분으로 별다른 준비 없이 길을 나섰다.

    이게 큰 오판이었다. 모름지기 산을 오를 때는 겸손해야 하거늘, 방심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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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봉산3.jpg[등산 안내도]

 

   팔봉산의 등산은 북쪽의 양길리 주차장이나 남쪽의 어송리 주차장에서 시작한다. 그중 양길리 주차장에서 시작하여 1,2봉을 거쳐 3봉이나 4봉까지 올랐다가 원점회귀하는 방식을 흔히 택하는데, 촌부의 이번 산행은 동행하신 김텃골 교수님 내외의 제안에 따라 어송리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여덟 봉우리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모두 종주(8봉부터 1봉까지)한 후 양길리 주차장으로 하산하는 코스를 택하였다.

 

   아침 10시에 산행을 시작했다. 어송리 주차장에서 출발하자 곧 갈림길이 나왔다. 서태사를 거쳐 8봉으로 올라가는 길과 팔봉산 남쪽의 금강산 방향으로 가는 임도가 갈라지는 곳이다.

   이곳에는 서태사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서 있고, 그 오른쪽 옆에 붉은 리본이 달려 있다. 사전 지식이 조금만 있었더라도 서태사 쪽으로 방향을 잡았을 텐데, 서태사가 8봉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아예 몰랐던 데다 리본이 금강산 방향의 임도 쪽에 있어 그쪽으로 길을 잡았다. 이게 고난을 자초한 실착이었다.  

 

팔봉산4.jpg[임도]

 

   임도라 길이 평탄하여 룰루랄라 걷는데, 아무리 가도 넓은 임도일 뿐 산봉우리로 오르지를 않고 8봉 가는 이정표도 나타나지 않았다. 뒤늦게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산악자전거를 탄 사람이 지나가길래 길을 물으니 이 길은 8봉으로 올라가는 길이 아니란다. 

 

   촉각이 뛰어난 김텃골 교수 사모님의 말씀대로 임도에서 산 위쪽으로 난 오솔길(마침 부근에 이런 오솔길이 있는 게 눈에 띄었다)로 방향을 틀어 숲을 헤치고 헐떡이며 한동안 오르니 7봉과 8봉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나왔다. 비로소 제대로 된 등산로에 선 것이다. 힐끗 시계를 보니 그동안에 한 시간이 흘렀다.

 

팔봉산5.jpg[7봉 방향과 8봉 방향을 가리티는 이정표] 

 

    이제부터 능선길이다. 종주를 하기로 했으니 8봉까지 갔다가 되돌아와야 한다. 하지만 8봉이 고작 80m 떨어진 지척에 있는지라 힘든 일은 아니다. 마침내 오전 11시 20분에 첫 봉우리인 8봉에 도착했다. 이곳은 해발고도가 319m이다.  

 

팔봉산6.jpg[제8봉]

 

    8봉부터 정상인 3봉까지 가려면 7봉(295m), 6봉(300m), 5봉(290m), 4봉(330m)을 오르내려야 하지만, 그래봐야 해발고도가 모두 300m 내외이고, 전체 거리도 800m 조금 더 되는 정도이다.  

    게다가 6봉까지는 경사가 완만하고, 그 정상들도 각각 표지석이 있으니까 그 봉우리의 정상인가보다 할 정도이다. 이쯤 되면 이번 산행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과연 그럴까.    

 

팔봉산7.jpg[제7봉]

 

팔봉산8.jpg[제6봉]

 

     6봉을 지나면 곧 나오는 5봉은 6봉보다 높이가 낮은데, 정작 이 봉우리에 오르려면 짧기는 해도 암벽에 놓인 밧줄을 의지해야 하는 구간이 있다. 팔봉산 암릉의 맛보기에 해당하는 곳이다. 산행 시작 2시간 만에 비로소 산을 오르는 기분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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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봉산9.jpg[제5봉 오르는 길과 5봉 정상] 

 

    5봉에서 200m를 더 가면 4봉이다. 불과 200m에 불과한 구간이지만 이 구간에는 발아래로 들판이 아스라이 펼쳐지는 깎아지른 절벽이 있고, 급경사를 오르기 위한 철계단도 있다. 팔봉산이 이름값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구간에서 재미있는 물건을 하나 발견했다. 올봄에 하도 산불이 많이 난 탓일까, 특이하게도 능선에 소화기를 하나 비치해 놓았는데, 그 통의 겉면에 영어와 한글을 섞어 “Fire 킬라”라고 써 놓은 것이다. 국적 불명의 이 표기에 쓴웃음이 절로 났다.

    4봉 정상에서는 들판이 내려다보일 만큼 봉우리로서의 구색을 제법 갖췄다. 4봉에서는 3봉, 2봉을 거치지 않고 바로 하산하는 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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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봉산15.jpg[제4봉 오르는 구간의 절벽, 철계단, 소화기, 그리고 정상]

 

    4봉에서 정상인 3봉까지는 거리가 250m이다. 이 구간 역시 거리는 짧지만 제대로 된 암릉길이어서 오르기가 만만치 않다. 땀을 제대로 흘리는 곳이다. 후술하는 3봉과 2봉 사이의 구간을 포함하여 팔봉산에서 제일 험한 구간이다. 최고 높이가 고작 361.5m인 산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경사가 급하고 험하다. 

 

    전형적인 암봉인 3봉을 중심으로 한 이 앞뒤 구간만 놓고 보면 최고 높이가 1,361.5m인 산이라고 해도 될 만하다. 해발 400m도 안 되는 낮은 산이라고 만만히 보면 안 되는 까닭이자 이 산에 등산객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아닐는지.

 

팔봉산16.jpg[제3봉 가는 암릉길]

 

    정오를 넘겨 오후 12시 44분에 3봉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답게 사람들로 붐빈다. 촌부 일행처럼 8봉부터 거쳐온 것이 아니라 대부분 양길리 주차장에서 1,2봉을 거쳐 올라온 사람들이다. 

    여덟 개의 봉우리를 형상화한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정상에 서면 가로림만(加露林灣)의 남쪽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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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봉산18-1.jpg[제3봉 전경과 표지석]

 

팔봉산19.jpg[제3봉 정상에서 보이는 가로림만의 남쪽 부분]

 

    3봉에서 400m 떨어진 2봉까지 가는 길은 팔봉산에서 경사가 가장 급한 구간이다. 그래서 곳곳에 철계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 계단을 내려가는 것조차 현기증이 난다. 정상의 해발고도가 고작 361.5m라는 게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길 위를 덮은 바위 밑으로 지나느라 허리를 잔뜩 구부려야 하는 곳도 있고, 팔봉산의 수호신인 용(龍)이 살면서 가뭄 때 비를 내려 주었다는 용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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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봉산22.jpg[제2봉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길]

 

팔봉산23.jpg[용굴]

 

    2봉은 해발고도가 270m로 3봉과의 표고 차이가 91.5m로 제법 벌어지는 데다, 길 자체가 급경사의 험한 암릉길이다 보니 3봉에서 2봉까지 400m 내려가는 데 거의 30분이 걸렸다.

 

   2봉정상에는 명물인 코끼리바위가 있다. 표지판에는 앞뒤로 남자 코끼리바위와 여자 코끼리바위가 있어 코끼리부부바위라고도 한다는데, 여자코끼리로 보이는 바위가 촌부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5년 전에 한 백내장 수술의 약효가 떨어져 시력이 도로 나빠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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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봉산25.jpg[제2봉과 코끼리바위]

 

     2봉에서 1봉을 쪽으로 난 100m의 경사진 길을 내려가면 삼거리 안부가 나온다. 도중에 거북바위와 우럭바위가 있다는데, 촌부의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정말 시력이 나빠진 걸까. 하긴 요새는 백내장 수술한 초기보다 보이는 게 영 시원찮다. 

 

    안부에는 벤치가 설치되어 있어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100m 올라가면 1봉이고, 서쪽으로 난 길을 내려가면 양길리 주차장으로 이어진다. 결국 1봉을 올라가면 이곳으로 다시 내려와서 양길리 주차장 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순간적으로 이젠 다리도 아픈데 되돌아올 거면 1봉은 오르지 말까 하는 유혹이 머리를 스쳤지만, 그렇게 되면 팔봉산 종주가 미완성으로 남게 되는지라 유혹을 떨치고 1봉으로 향했다. 겨우 왕복 200m 아닌가. 

      

팔봉산27.jpg[제2봉과 제1봉 사이의 안부]

 

     1봉은 해발고도가 210m로 팔봉산 중에서 높이가 가장 낮지만, 2봉과의 사이에 안부가 있어 2봉과 명확히 구분되고, 그 바람에 2봉에서 내려오면서 봉우리 전체의 모습을 뚜렷이 조망할 수 있다.

 

     그 덕에 단순히 숫자로 불리는 다른 봉우리들과 달리 유일하게 별도의 이름을 갖는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 그것도 이름이 감투봉과 노적봉의 두 개이다.

    표지판에 적혀 있는 설명에 따르면, 1봉은 그 모습이 높은 벼슬에 오른 대감의 감투 또는 노적을 쌓아 올린 모양과 같다 하여 그렇게 불린다는 것이다. 또한 이 봉우리에서 소원을 빌면 부귀영화를 얻는다는 전설이 전해온다고 한다. 바다와 농촌 풍경이 어우러져 팔봉산 최고의 전경을 볼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여 있다.

 

팔봉산28.jpg[제1봉 전경]

 

    안부에서 1봉 오르는 길은 바윗길이기는 해도 2봉에서 안부로 내려온 길보다는 한결 수월하다. 1봉의 정상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들판 너머로 가로림만이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펼쳐진다. 팔봉산 최고의 전경을 볼 수 있다는 설명이 과언이 아님을 알게 된다.  고개를 돌려 온 길을 돌아보면 제2봉과 제3봉이 아쉬운 듯 작별인사를 한다.  

    멋진 풍광에 이황 선생의 흉내를 내 시 한 수를 흥얼거린다.

 

      팔봉산 재1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

      백구야 떠들겠냐 못 믿을 손 유튜브라

      유튜브 입 다물라 모다 알까 하노라

 

팔봉산29.jpg[제1봉에서 바라본 전경]

 

팔봉산26.jpg[제1봉에서 바라본 제2봉과 제3봉]

 

    1봉의 표지석은 봉우리 정상의 바위 밑에 있는데, 그곳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잠시 주제넘게 암하좌불(岩下坐佛)의 행세를 해본다. 그런다고 누가 뭐라 시비를 걸 것도 아니고, 힘들게 암봉을 오르는 산객의 특권을 누려보는 것이다.

     "나무팔봉보살마하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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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봉산31.jpg[제1봉 정상과 암하좌불]

 

    1봉에서 안부로 되돌아와 양길리 주차장 쪽으로 하산했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오후 2시 30분이다. 통상 3시간이면 종주할 수 있다고 하는데, 4시간 30분이나 걸렸다. 산행 초반에 8봉을 못 찾아 헤맨 것을 감안하더라도 오래 걸린 셈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판단력이 흐려지고 발걸음도 느려짐을 어쩌랴.

 

    이날 산행 일정의 마지막으로 양길리 주차장에서 1봉으로 향하는 입구에 있는 “산 아래 쉼터”라는 식당에 들어가 늦은 점심으로 민생고를 해결했다. 막국수와 콩국수에 곁들인 해물파전이 별미다. 특히 해물파전은 소위 역대급으로 강추이다.  

 

     밥도 먹었으니 이제는 서산 시내로 들어가 목욕을 하고 귀경하는 일만 남았다.  산행일정을  마련해 주신 텃골 교수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팔봉산32.jpg[산  아래 쉼터]

 

[김명민의 클래식 마에스트로 - V.A.] 라흐마니노프: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제 18변주.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