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무심탄 말이 아마도 허랑하다

 

     2025. 10. 9. 영남알프스를 다시 올랐다. 1999. 10. 30.에 처음 올랐고,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2011. 11. 12.에 다시 오른 후 14년이 지나 이번에 세 번째로 다시 오른 것이다.

     앞의 두 번은 모두 법원 식구들과 올랐는데, 이번에는 청도 운문사(雲門寺) 스님들과 오른 것이 크게 달라진 모습이다. 그 사이에 촌부가 법원을 떠나(2015. 9. 16.) 야인(野人)으로 신분이 바뀐 까닭이다.

 

    유난히도 길었던 추석 연휴를 맞아 전부터 주지 은광스님과 설왕설래하였던 산행을 위해 운문사(雲門寺)를 찾은 게 연휴의 끝 무렵인 2025. 10. 8.이다언제나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는 소녀 같은 은광스님이 환한 얼굴로 맞아주셨다.

 

    스님의 안내로 운문사의 경내를 산책하며 외부인 출입금지구역까지 다 둘러보았다. 우리나라 최대의 청정 비구니 도량인 천년고찰 운문사는 전에도 몇 번 와 보았지만 여전히 생소한 곳이 많다

    산책 후 정성이 깃든 공양으로 저녁 식사를 하고, 스님들이 커다란 법고(法鼓)를 치는 모습을 보며 그 소리를 듣는 등 입()과 눈()과 귀()가 호사를 누렸다. 이어서 주지실에서 은광스님이 팽주(烹主)로서의 높은 경지를 발휘하여 타 주신 말차(抹茶)의 향으로 코() 끝을 적셨다

    그리고 스님이 특별히 마련해 주신 처소 전향각(篆香閣)의 따뜻한 온돌방이 한양에서부터 긴 시간 운전하고 온 나그네의 몸()에 쌓인 피로를 말끔하게 씻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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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5.jpg[운문사의 이모저모. 맨 아래 사진이 전향각이다]

 

   깊은 산중의 고요한 산사에서 밤을 지내고 난 다음날 새벽, 경내에 은은히 울려 퍼지는 도량석(道場釋)은 번뇌에 물든 머릿속()을 청정하게 해 주는 염화시중의 법문이었다.

    대웅전 안의 새벽예불은 엄숙함 그 자체이면서도 왠지 모를 푸근함이 감돌았다. 그래서일까, 오랜만에 108배를 하였는데도 힘든 줄 모르겠다. 마땅히 도량을 환히 비추고 있어야 할 보름달이 여전히 구름 속에 숨어 있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날이 밝아 옴에 따라 어느 산을 오를까 스님들과 의논 끝에 밀양 얼음골로 가서 케이블카를 타고 천황산(天皇山. 1,189m)을 거쳐 신불산(神佛山. 1,159m)까지 가기로 했다. 촌부는 이 코스가 처음이지만, 은광스님은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 홀로 자주 이용하는 산행코스라고 하신다. 당초 예정했던 운문산 등산은 비로 인해 바윗길이 미끄럽고 위험해 후일을 기약했다.

 

   운문사에서 밀양 얼음골의 케이블카 승강장까지는 대략 50분 정도 걸린다. 20129월부터 운행을 시작한 이곳의 케이블카는 50인승 대형으로 하부승강장에서 해발 1,020m의 상부승강장까지 1.8㎞를 10분 만에 올라간다(20분 간격으로 운행).

    평소에는 몰려드는 인파로 많이 붐빈다는데, 연휴의 끝인 데다 날씨가 흐린 탓인지 이날은 그다지 붐비지 않았다. 그런데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내내 산 위를 덮고 있는 구름이 산객의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산행이 불가능한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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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시에 출발하는 케이블카를 타고 10분 만에 상부승강장에 도착했다. 밖으로 나서니 야속하게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작금에 여름인지 가을인지 헷갈릴 정도로 비가 자주 와 한양을 떠나올 때부터 다소 염려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일기예보상으로는 분명 비가 더 이상 안 온다고 해서 기대를 했는데, 하늘도 무심하지 14년 만의 영남알프스 산행을 이리도 가로막는단 말인가.

 

    다행히 이슬비 내지 안개비 정도여서 비옷을 입고, 발걸음을 옮겼다. 우산도 챙겼다. 케이블카 상부승강장에서 천황산으로 오르는 주능선길이 외길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곳에 자주 오셔서 길을 잘 아는 은광스님이 앞장을 서셨다. 일단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했다.

 

    계단과 나무데크로 된 하늘사랑길 250m10여 분 걸려 올라가자 하늘정원이라는 전망대가 나왔다. 이곳에서 운문산, 백운산, 얼음골 계곡 등을 조망할 수 있다는데, 허망하게도 모두 구름 속의 허깨비일 뿐이다. 인증샷 한 장만 남기고 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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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망대에서 내려서면 나무데크길이 끝나고 빗물이 고인 내리막의 진흙탕길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조심조심 내려가면 건물 한 채(샘물상회)가 있는 넓은 공간이 산객을 맞이한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난 갈림길(임도)을 외면하고 정면으로 직진하면 산의 정상으로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진다.

 

    정상적인 날씨라면 이제부터는 좌우에 늘어선 억새들을 감상하느라 마땅히 발걸음이 느려져야 한다. 그러나 보이는 건 구름뿐이니 어찌할 거나. 그래도 내심 곧 구름이 걷히고 하늘이 열리겠지하고 소망해 보았지만, 끝내 희망고문으로 그치고 말았다. 오히려 계속 오락가락하는 비에 바람까지 더해지니 오슬오슬 춥기만 했다.

    그나마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억새는 잦은 비에 처 피지도 못한 채 시들어가고 있었다. 길옆의 문어를 닮은 기이한 모습의 소나무만 객을 반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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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오르내림이 없이 오전 1030분 천황산 정상에 도착했다. 바위와 돌투성이의 밋밋한 봉우리다. 天皇山. 海拔 1,189m’라는 글씨가 새겨진 커다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여전히 구름뿐이다. 야속하기도 하지, 저 구름은 하필이면 왜 촌부 일행을 따라다니며 하늘을 가리누.  

    고려말의 문신 이존오(李存吾. 1341-1371)가 지은 시조를 떠올린다. 시조의 시대적 배경을 논외로 하면 그냥 시인이 읊은 그대로의 정경이다.

 

   구름이 무심탄 말이 아마도 허랑하다

   중천에 떠 있어 임의로 다니면서

   구태여 광명한 날빛을 덮어 무삼 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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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구름에 덮여 있을망정 정상에 오른 김에 사족(蛇足)으로 이 산의 이름을 짚어본다.

   촌부가 전술한 것처럼 처음 영남알프스를 찾은 1999. 10. 30.에는 이 산의 봉우리에 아래 사진처럼 사자봉이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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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들은 바로는, 정상 부근의 바위들이 거칠고 봉우리가 날카로우며, 멀리서 보면 마치 사자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여 본래 사자봉으로 불렸는데, 일본인들이 자기네의 천황(天皇)을 기리느라 天皇山이라 하였고 지도에도 그렇게 표시되어 있으나, 그 무렵에 본래의 이름인 사자봉을 되찾아 그 이름을 쓴 표지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산이 높고 웅장해서 하늘의 황제(또는 신)가 머물렀다거나, 산세가 웅장하고 운무가 자주 끼어 신령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기 때문에 천황산(天皇山)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촌부의 좁은 식견으로는, 우리나라에서는 고대 이래로 천황(天皇)’이라는 단어 자체를 사용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안다(이 점은 중국도 마찬가지다). 천황(天皇)’이라는 말은 일본인들이 자기들의 국왕을 높여 부르는 용어일 뿐이다. 따라서 위 반론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아무튼 현재는 표지석에 위에서 본 것처럼 다시 天皇山이라고 새겨져 있고, 항간에서도 천황산과 사자봉을 혼용(또는 병기)하고 있는 듯하다. 이 분야의 권위자들이 보다 깊이 연구하여 결론을 낼 일이다.

 

    구름이 쉽게 걷힐 것 같지 않아 신불산까지 가는 것은 단념하고 온 길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그렇게 되돌아서 반쯤 내려가자 하늘이 열리기 시작하더니 케이블카 승강장 상부에 도착할 즈음에는 주위 산들의 모습이 눈에 뚜렷이 들어왔다. 진작 좀 그럴 것이지... 아무래도 훗날 다시 오라는 게 사자봉 산신령의 뜻인 모양이다.  정확히 정오(12)에 하행선 케이블카에 몸을 실었다.

 

     그나저나 사자봉 산신령의 뜻대로 이곳을 과연 다시 올 수 있을까.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은데, 고희(古稀)를 넘긴 촌부에게 남겨진 시간은 길지 않으니 어찌 할거나.

      글을 마치며 나그네를 살갑게 대해 주신 운문사의 주지스님을 비롯한 모든 스님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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