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티끌 속에 온 우주가(一微塵中含十方)

    

  신록의 파도가 산허리를 감싸 안는 5월의 북한산은 오래된 경전의 첫 장을 펼치듯 경건하다. 거친 바위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수록 그동안 세파에 시달려 요동쳤던 마음은 아래로 가라앉는다. 

 

   천중지가절(天中之佳節)의 싱그러운 주말(2026. 5. 9.)을 맞아 북한산 의상봉을 찾았다. 올해 들어 지난 2월 7일에 이어 두번째다. 

   북한산성 입구 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하여 의상봉을 오른 후 국녕사 쪽으로 하산하여 탐방지원센터로 원점회귀하는 코스는 3~4시간 정도 소요되는데, 총 거리가 비교적 짧고 소요시간이 길지 않음에도 설악산을 오르는 듯한 험준한 산행을 경험하고, 그에 더하여 멋진 경치를 구경할 수 있어 촌부가 북한산에서 즐겨 찾는 곳 중 하나이다.  

 

   탐방지원센터에서 의상봉으로 오르는 길은 초기에만 잠깐 쉬울 뿐(그래서 오늘 이곳을 처음 오른 한 도반은 청계산 온 것 같다고 했다가 이내 그 말을 취소해야 했다), 의상봉 정상에 도착하기까지 차가운 쇠줄 난간에 의지해 급경사의 암벽을 연이어 지나야 해서 꽤나 어렵다.

    촌부의 산행 경험으로는, 서울 근교 산행코스 중 관악산의 육봉능선, 도봉산의 다락능선(+ Y계곡)과 더불어 북한산의 이 의상봉능선이 3대 험한 코스에 속한다.    

 

   이날 계절의 여왕이 시작되는 푸른 오월의 더이상 좋을 수  없는 화창한 주말임에도 찾는 발길이 드물었는데, 그 이유를 몸이 먼저 깨닫는다. 좁은 길과 급한 경사, 어느 순간부터 산은 인간의 의지를 시험하듯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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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험로의 끝에서만 허락되는 최고의  풍경이 산객을 반긴다. 산중턱의 암벽과 기묘한 바위가 연출하는 비경에 혼미해진 정신을 수습하여 정상(해발 502m)에 서면, 발아래로 겹겹이 물결치는 능선들이 천년의 세월처럼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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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상봉이라는 이름은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로부터 왔다. 반면에 맞은 편에서 서로 바라보고 있는 원효봉(해발 505m)은 동시대의 원효대사로부터 유래한다(원효대사가 의상대사보다 여덟살 위다). 

 

   두 고승은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가 유명한 ‘해골물 사건’을 계기로 길이 갈렸다.  

   원효대사는 유학을 접고 신라로 돌아가 승복을 벗은 후 저잣거리로 나가 지식인들만의 종교였던 불교를 민중의 종교로 승화시킨 반면에, 의상대사는 처음 마음먹었던 대로 당나라로 건너가 지엄대사 밑에서 화엄학을 수학한 후 이를 신라의 체계와 신앙에 맞게 정립하였다. 

 

의상봉5.JPG[의상봉(좌)과 원효봉(우)]

 

   마주 보고 있는 두 봉우리 중 모나지 않게 둥근 사발 모양으로 푸근한 모습의 봉우리를 원효봉이라 이름 짓고, 깎아지른 절벽 위에 뾰족한 정상을 갖추고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의 봉우리를 의상봉이라 이름지은 것은 바로 두 고승의 위와 같이 대비되는 생애를 반영한 것이 아닐는지.  

 

   아무튼 의상대사는 “하나의 작은 티끌 속에 온 우주가 들어 있으니, 모든 것이 하나이다(一微塵中含十方, 一卽一體多卽一)”라는  화엄의 세계를 설파했다.

   대사는 아마도 이 험준한 봉우리에서 수행하면서 깨달았을 것이다. 산과 사람, 바람과 돌, 삶과 수행이 결코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을.

 

   의상봉 정상에서 내려서면 바로 가사당암문(해발 488m)이 나온다. 북한산성에 있는 7개 암문 중 하나인 이 암문을 지나 직진하면 용출봉(龍出峰. 해발 571m)으로 오르게 된다.

    그러나 촌부의 발길은 용출봉 대신 당초의 계획대로 암문의 동쪽 아래에 있는 국녕사(國寧寺)로 향했다. 

 

의상봉6.jpg[가사당암문]

 

   '나라(國)의 평안(寧)을 기원한다'는 이름처럼, 조선시대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조하며 세워진 국녕사는 역사의 부침을 겪고 일어선 곳이다.

   용출봉의 심장인 용심혈(龍心穴)에 자리 잡은 절 마당에 서면 산세가 마치 하늘로 비상하는 용의 기상을 닮았음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곳은 단지 그런 지세의 형용이 아니라, 비워진 마음이 평온히 머무는 자리임을 실감하게 하여 명당이 아닐까 싶다.

 

의상봉4.jpg[국녕사 국녕대불]

 

   절 마당에서 거대한 국녕대불과 마주했다. 24m의 청동좌불은 의상능선 어디서든 보일 만큼 웅장한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마음을 흔드는 것은 그 거대함이 아니라 두 손을 모은 합장인(合掌印)이다. 세상을 굽어보는 권위의 손이 아니라, 중생과 함께 허리 숙여 기도하는 부처의 손, 그 모습은 위엄이 아닌 지극한 자비였다.

 

    대불 아래에서 합장을 하고  삼배를 하면서 인간의 삶이 오늘의 산행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험난한 바위를 오를 땐 끝이 보이지 않아 막막하지만, 힘들여 한 걸음씩 오르다 보면 어느덧 능선 위에 닿는다. 그리고 그 끝에서 우리가 얻는 것은 대단한 깨달음이 아니라, 두 손을 조용히 모으는 겸손한 마음 하나이리라.  

 

   초록이 짙어가는 5월의 북한산에서, 산을 오른 것이 아니라 오래된 자비의 시간을 거닐고 돌아온 여정을 시 한 수로 읊어본다, 

 

   물결치는 신록 따라 의상봉을 올라가니

   험디 험한 바윗길에 거친 숨은 낮아지고

   대불의 합장한 미소가 탐진치를 경계하네 

 

 문득 AI는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 물었더니, 즉각 답을 준다. 그 답을 일부 고쳐 옮긴다.    

 

    登義相峯 (등의상봉: 의상봉에 올라)

 

    翠浪擁山腰 (취랑옹산요) 

    險欄試我心 (위란시아심) 

    大佛合掌笑 (대불합장소) 

    萬山一塵中 (만산일진중) 

 

    푸른 물결이 산허리를 감싸 안고

    험준한 난간은 내 마음을 시험하네

    대불은 두 손 모아 미소 짓는데

    온 산이 한 티끌 속에 들어있구나

 

(추기)

    북한산성 쪽을 오르내린다면 산행 후 제1주차장 뒷쪽 맛집거리에 있는 '만석정'(한정식집)과 '그집'(찻집)을 꼭 들러볼 것을 권한다.   

 

김영동2.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