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공룡능선 위에 서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두 번 다시 가지 않을 곳처럼 말해 놓고는 결국 다시 그 앞에 서게 되는 일이 있다. 촌부에게는 설악산 공룡능선이 바로 그런 곳이다. 2007년 5월 20일 처음 공룡능선을 종주했을 때 촌부는 지인(知人)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너무 힘들어 두 번은 못 가겠소. 하지만 한 번은 꼭 가볼 만한 곳이오.”

  

   당시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그날 이후에도 대청봉을 오르고 봉정암을 찾는 등 설악산에 여러 번 발걸음을 들여놓았지만, 공룡능선만큼은 의식적으로 피해 왔다. 다시는 그 험한 암릉을 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월이란 게 참으로 묘하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시간이 흐른 뒤인 2026년 5월 17일 촌부는 다시  그 길 위에 서 있었다. 그것도 고희를 훌쩍 넘긴 나이에.

 

공룡1.jpg[백담사에서 영시암, 수렴동, 봉정암, 소청을 지나 공룡능선으로 이어지는 길]

 

   이번 공룡능선 산행은 단순히 산을 오르내리는 게 아니었다. 오래전에 “다시는 못 간다”고 했던 길을 19년 만에 다시 마주하는 여정이었고, 시간과 촌부 자신을 건너는 과정이었다. 등산로 입구 산행지도 위의 선들은 단순한 탐방로가 아니라, 지나온 세월과 재회하는 마음의 이정표였다. 

 

   2026년 5월 16일, 서울을 출발해 백담사(百潭寺)에 도착했을 때 산은 맑고 조용했다. 극락화보살님의 배려로 절에서 점심 공양을 하고, 영시암(永矢庵. 이 절의 창건자인 김창흡은 특이하게도 조선시대의 유학자이다)을 지나 수렴동계곡으로 들어서자 비취색 계곡물이 객을 반겼다. 햇살 아래 반짝이는 푸른 물웅덩이들을 보고 있노라니 사람 마음속에도 저런 맑은 빛 하나쯤은 숨어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공룡1-1.jpg[백담사 경내로 들어가는 다리]

 

공룡2.jpg[수렴동계곡의 비취색 물웅덩이]

 

   흙길, 데크길, 그리고 너덜길이 교차하는 등산로를 따라 봉정암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쌍룡폭포를 만났다. 좌우의 두 계곡에서 암벽을 타고 내려오는 물이 두 줄기 폭포를 이룬 곳이다. 폭포 앞의 전망대에서 가쁜 숨을 잠시 고르노라면,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줄기에서 뿜어 나오는 서늘한 기운이 나그네의 땀을 식혀 준다. 산을 오르는 길은 힘들어도 멈춘 자리에서는 그 산이 이렇듯 보답을 한다.

 

공룡3.jpg[쌍룡폭포 앞 전망대]   

 

   쌍룡폭포를 지나면 깔딱고개가 산객을 기다린다. 말 그대로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곳이다. 그런데 이정표에 적혀 있는 이 고개의 이름이 ‘해탈고개’이다. ‘무슨 의미일까’ 하는 궁금증은 고갯마루에 있는 전망대에 서는 순간 해소되었다. 

 

공룡3-1.jpg[해탈고개]

 

   용아장성(龍牙長城)의 웅장한 암봉들과 멀리 펼쳐진 산줄기들이 겹겹이 이어지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장대한 풍경에 넋을 잃었고, 숨을 깔딱거리며 힘들게 올라왔다는 생각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바로 ‘해탈’의 장소이자 시간이다. 동행한 도반이 한마디 한다.

 

  “장가계 같네요.”

 

   정말 그랬다. 구름 사이로 솟은 바위 능선들이 중국 산수화 속 풍경처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그나저나 한 가지 부끄러운 것은, 그동안 이 해탈고개를 수없이 넘어다녔건만 이날에야 비로소 이 멋진 전망대의 존재를 알았다는 것이다. 전망대를 가리키는 아무런 표지판이 없기도 하지만, 자고로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다.

 공룡4.jpg[해탈고개 정상의 전망대에서 보는 풍경]

 

공룡5.jpg[잠시 앉아 숨을 고르는 순간에도 눈앞의 풍경이 넋을 잃게 한다]

 

   오후 다섯 시 무렵 봉정암(鳳頂庵. 해발 1,220m)에 도착했다. 주지 본원 스님의 배려로 저녁 공양을 맛있게 한 후 불뇌보탑(佛腦寶塔)으로 가서 삼배(三拜)를 올렸다. 전망이 빼어난 이곳에서 다음날 건너야 할 공룡능선을 바라보노라니, 어둑해지는 하늘 아래 검푸른 암릉이 길게 누워 한양 나그네를 향해 반갑다고 손짓하는 듯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그 어떤 존재처럼 그 능선이 다가왔다.

 

공룡6.jpg[산중에 우뚝 선 사리탑과 해 질 무렵의 능선. 봉정암은 지나치는 곳이 아니라 마음을 잠시 내려놓는 방하처(放下處)이다]

 

공룡6-1.jpg[사리탑의 전망대에서]

 

   이날 밤 봉정암에서는 ‘부처님오신날’을 봉축하는 연등행사가 열렸다. 깊은 산중의 어둠 속에서 수많은 연등 불빛이 흔들렸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조용히 불빛을 바라보며 각자의 마음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두려움도 조급함도 멀어졌다.

   산에서 맞는 밤은 도시의 그것과 다르다. 어둠은 더 짙고 불빛은 더 따뜻하다. 산길을 따라 이어진 연등은 축제용의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일의 고된 길 앞에서 마음을 다독여 주는 위안의 손길이었다. 어둠이 깊어갈수록 방랑객의 마음이 더욱 평온해짐은 왜일까.

 

공룡8.jpg[밤의 봉정암 석탑 앞에 모인 대중들. 어둠 속의 불빛이 마음의 위안으로 다가온다]

 

공룡9.jpg[숲길을 따라 이어진 연등. 흔들리는 불빛이 길보다 마음을 밝힌다]

 

   2026년 5월 17일 새벽 다섯 시,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는 산길을 따라 소청봉(해발 1,581m)으로 향했다. 급경사의 험한 길과 한 시간 씨름하고 다다른 봉우리의 동쪽 하늘이 조금씩 붉어지더니 마침내 해가 떠오른다. 시원한 바람이 옷깃을 스쳐가고 멀리 동해바다의 물결이 반짝이는데, 사위(四圍)가 순간적으로 정적에 잠기는 것은 왜일까.  그 광경을 AI의 도움을 받아 율곡선생을 흉내낸 시 한 수로 읊어본다.

  

    杖藜艱登小靑峰(장려간등소청봉)

    淸風吹過衣襟邊(청풍취과의금변)

    碧空紅染晨光裏(벽공홍염신광리)

    東海遙波閃遠空(동해요파섬원공)

 

    지팡이 짚고 힘겹게 소청봉에 오르니

    시원한 바람이 옷깃을 스쳐가네

    푸른 하늘은 붉은 여명에 젖어들고

    동해 물결 멀리서 아득히 빛나누나

 

공룡10.jpg[하늘과 능선 사이로 번지는 빛이 산객에게 용기를 준다.]

 

   소청봉에서 희운각대피소(해발 1,065m)로 내려가는 길도 꽤나 험하다. 대피소는 그 옛날의 허름한 산장이 아니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마음먹고 새로 지은 듯 적어도 외양은 그럴싸했다(내부는 들어가 보지 않아 모르겠다). 대피소 마당의 식탁에서 봉정암의 공양주보살님이 싸주신 주먹밥으로 아침을 먹고 무너미고개로 향했다. 드디어 공룡능선이 시작되었다.

 

공룡10-1.jpg[공룡능선 전경]

 

   공룡능선에서 첫 번째로 대면하는 봉우리인 신선봉(=신선대. 해발 1,204m)에 오르려니 예전 기억이 새롭다. 19년 전에는 밧줄 하나 붙들고 바위를 기어올랐는데, 지금은 철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세월의 흐름은 산객의 몸만이 아니라 산에도 조금씩 흔적을 남기고 있다.

 

공룡11-1.jpg[철난간을 붙잡고 오르는 암릉길]

 

  그렇게 흔적을 남기며 시간이 흐르지만, 공룡능선은 여전히 공룡능선이었다. 해발 1,200m 내외의 봉우리들을 때로는 오르내리고, 때로는 옆으로 끼고 도는 능선길은 한 번의 수고로 끝나지 않는 삶의 축소판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험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공룡능선이건만, 이날은 유난히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날씨도 화창하고 좋았지만, 그보다는 봄철 산불방지를 위해 설악산이 72일 동안 입산 통제되었다가 이날 처음 개방된 탓이리라(5/16~5/17 이틀간 설악산 탐방객이 32,200명이나 되었다). 

   좁은 암릉에서는 오르는 사람과 내려오는 사람이 서로 길을 비켜 주며 오래 기다려야 했다. 특히 ‘1275봉’ (해발 1,275m) 구간은 여전히 힘들었고 정체도 심했다. 다리는 무겁고 숨은 거칠었다. 마지막 나한봉(해발 1,298m)에 이르렀을 때는 정말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공룡12-2.jpg[기암괴석과 초록 숲이 맞물린 공룡능선. 보는 것만으로도 그 험함과 아름다움에 질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힘들면서도 눈앞의 풍경은 점점 더 크고 아름답게 다가왔다. 무릇 사람이 정상 정복만을 위해 산을 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저런 풍경 앞에서 잠시 자기 자신을 잊고 싶어서, 누군가는 세월의 무게를 잠깐 내려놓고 싶어서 산에 오를지 모른다.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도솔천을 품고 사는 게 아닐는지.

 

   아무튼 공룡능선은 힘이 들기에, 바로 그래서 더 오래 가슴에 남는다.

 

   끝없이 이어지는 암봉들 

   오르면 내려가야 하고 

   내려가면 다시 올라야 하고 

   그리고 또다시 내려가는 길

 

   산길을 따라 오른쪽으로는 화채능선, 왼쪽으로는 용아장성이 펼쳐지고, 멀리 동해의 푸른 물빛까지 어른거린다. 그리고 뒤돌아보면 대청봉이 따라온다. 왜 나를 두고 가느냐고 묻는 듯하다. 

 

공룡12-1.jpg[화채능선]

 

공룡12-3.jpg[용아장성]

 

공룡12.jpg[대청봉이 따라오며 묻는다. “이시렴 부디 갈따 아니가든 못할쏘냐” ]

 

   이날은 유난히 날씨가 더웠다. 거의 한여름 같아서 물을 계속 마셔도 목이 말랐다. 그런데도 능선의 철쭉은 이제야 만개하고 있었고, 바위틈에는 가녀린 에델바이스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산 아래와 산 위의 계절이 마치 서로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그 작은 꽃을 바라보며, 사람도 나이에 따라 다른 계절을 살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시간은 이미 지나갔고, 어떤 시간은 이제야 피어난다.

 

공룡15.jpg[철쭉]

 

공룡14.jpg[에델바이스. 공룡능선은 웅장함만이 아니라 이런 미세한 생명까지 품고 있다.]

  

   오후 1시 50분, 마침내 마등령 삼거리(해발 1,209m)에 도착했다. 19년 전에는 이곳에서 비선대 방향으로 내려갔다. 경치가 더 좋고 설악의 장쾌함이 살아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짧고 수월한 오세암 쪽 길을 택했다. 조금은 아쉬웠다. 

   하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젊은 날의 몸과 지금의 몸은 다르다. 나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걸음의 속도를 배우는 일이다.

 

공룡15-1.jpg[마등령 삼거리의 이정표]

 

   오후 3시가 다 되어 오세암(五歲庵. 폭설에 갇힌 다섯 살<五歲> 아이를 관세음보살이 구원해 주었다는 설화가 전해오는 절이다. 해발 760m))에 도착해 늦은 점심을 먹었다. 떡과 육포, 그리고 포도가 일용할 양식이었다. 절 마당에 앉아 쉬고 있는데 ‘시무외전(施無畏殿)’이라는 이름의 법당이 눈에 들어왔다. 

 

   두려움을 없애 주는 법당!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이다. 이곳에서 기도하면 관세음보살이 두려움을 없애 준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네 삶은 수많은 두려움에 싸여 있다. 나이 드는 것이 두렵고, 몸이 쇠하는 것이 두렵고, 언젠가는 더 이상 산에 오르지 못하게 되는 것도 두렵다. 

   그런데 공룡능선을 넘어 이곳까지 걸어온 뒤 바라본 시무외전(施無畏殿)의 현판이 촌부의 마음에서 두려움을 없애고 고즈넉한 여유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래, 너무 힘들어 넘기가 두려워서 다시는 안 온다고 하더니 결국은 또 한 번 넘어왔구나! 

 

공룡16.jpg[오세암의 시무외전]

 

   오세암에서 충분히 쉰 후에 다시 백담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백담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저녁 7시다. 그렇게 꼬박 열네 시간에 걸친 산행이 끝났다. 

 

  하산을 마치고 돌아보니 변한 것이 많다. 몸도 변했고, 걸음도 느려졌고, 산을 대하는 마음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넘는 것이 중요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걷는가가 더 중요해졌다. 그래서 정상을 향해 가는 길에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가다가 돌아보면 설악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오래된 벗처럼.

 

   이번 여정은 산을 넘은 것이 아니라 세월과 두려움을 넘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도 19년 전처럼 앞으로 다시는 안 가겠다고 작심을 하지만, 언제든 그리움 속에 그 길 위에 다시 설지도 모른다. 비록 완주는 못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완주가 아니라 내 발로 내 걸음으로 그 길을 걷는다는 것 자체가 아닐까.

 

  글을 맺으며, 힘든 산행을 함께 한 히말라야산우회 도반님들, 그리고 혜초여행사의 장성순님과 박민정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님들의 건승을 빈다. 

애고 도솔천아.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