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 위에 내린 눈이
2024.11.30 21:56
대입 수능 때만 되면 강추위가 찾아와 수험생들을 힘들게 하는 게 우리나라 날씨였는데, 올해는 수능을 보는 11월 14일에 외려 비가 오고 날이 푹해(서울의 아침 최저기온이 13도, 낮 최고기온이 17도) 사람들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더니, 이틀 후인 16일에는 서울의 아침 최저기온이 14도, 낮 최고기온이 23도일 정도로 따뜻하여 올해는 겨울이 늦게 오나 했다.
그러던 날씨가 17일부터 돌변하여 하루에 10도 이상 급락하였다.
더구나 눈 소식이 없던 소설(小雪. 11월 22일)이 며칠 지난 27일, 28일 양일간에는 40cm가 넘는 폭설이 쏟아졌다. 11월에 이런 폭설이 내린 것은 무려 117년 만의 일이라고 한다.
천지가 하얗게 덮인 풍광에 눈이 호강을 했지만, 반대급부가 만만치 않았다.
특히 이번에 내린 눈은 습기를 잔뜩 머금은 습설(濕雪)이라 피해가 컸다.
출퇴근길 대란은 물론이거니와,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무가 곳곳에서 쓰러지며 전신주를 덮쳐 정전사태가 발생하고, 심지어 사람이 깔려 사망하는 사고도 일어났다.
촌부의 금당천 우거(寓居)라고 예외가 아니다. 뜰 안 수양벚나무의 굵은 가지가 부러지고 소나무는 뿌리채 넘어가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이처럼 날씨가 급변하면 촌노(村老)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데, 하느님도 너무하시지 툭하면 심술을 부려 이제는 어떤 날씨가 정상이고 어떤 날씨가 비정상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아무리 인간이 자연환경을 훼손하였기로서니 그 대가가 이리도 심해서야 원,
흔히들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을 한다. 상황에 따라 여러 의미로 해석이 가능한데, 이 말을 날씨에 적용하면 “날씨 좋을 때 잘해”라고 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예년에는 11월 중순에 김장을 했다. 절기상 입동(立冬)과 소설(小雪)의 중간이라 가을 기운은 가시고 겨울 추위는 아직 찾아오기 전이라 시기적으로 적절하다.
그런데 올해는 여러 가지로 형편이 여의치 않아 보름 정도 늦은 오늘에야 김장을 했다. 폭설이 천지를 뒤덮은 가운데 하는 김장이라니~!
진즉 날씨 좋을 때 했어야 하는데....
“배추는 비닐을 덮어놓으면 눈 속에서도 자란다”고 하더니, 1주일 내내 아침 기온이 영하였음에도(어제는 영하 6도) 지난주에 혹시 몰라 비닐을 덮어놓은 배추들이 정말로 눈 속에서 싱싱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속도 노랗게 들었다. 반면에 무는 추위에 약해 지난주에 미리 뽑아 놓았다.
그런데 올해 늦게까지 계속된 무더위에 무(無)농약, 무(無)화학비료를 고수하다 배추의 거의 절반을 달팽이들한테 헌납했다. 그나마 중간에 커피 가루를 뿌린 덕에 전멸은 면했다. 내년에는 처음부터 대책을 세워야겠다.
그 배추를 뽑으며 이현보를 흉내 내 시 한 수를 흥얼거린다.
배추는 속이 들고 총각무 살졌는데
솔 위에 내린 눈이 김장을 재촉하네
벽촌의 맑은 맛에 대처를 다 잊는다
집사람이 며느리 고생시키지 않는다고 못 오게 하는 바람에,
고희(古稀)의 촌노(村老) 둘이서 영하의 날씨에 배추, 무, 알타리를 뽑으랴, 절이랴, 씻으랴, 양념하랴, 저장하랴....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직접 기른 청정 배추로 김장을 한다는 뿌듯함이 힘든 것을 잊게 했다.
겨우내(적어도. 사실 촌부는 김장김치를 1년 내내 먹는다) 먹는 김치만큼은 슈퍼마켓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것이다.
어느 시인은 그 김장김치를 이렇게 노래했다.
하얀 속살 뽀드득 씻은 알몸의
여리던 가슴
예리한 칼끝에 쪼개져
쑤셔 박히던 짜디짠 소금물통
간이 배어 적당히 세상맛이 들고
뻣뻣하던 줄기
부들부들 연해지거들랑
고춧가루 푼 비린 젓갈에 묻혀
숨 막히는 항아리 속
부글부글 끓어도 함께 끌어안고
사근사근 익어
한 겹 한 겹 쓰린 살을 비비며
새콤달콤 살다가
군내 나기 전에
빈 항아리만 남기고는 가는 거라고
사시사철 밥상 위에 올라
삶의 입맛을 돋군다
----김기덕의 김치----
밭에서 뽑았을 때는 뻣뻣하기만 한 배추도 소금물에서 일정 시간 수영하고 나면 부들부들 연해진다.
그리고 고춧가루와 젓갈을 만나 서로 끌어안고 살을 비비다 보면 농익어 농부의 입맛을 돋운다.
그게 이치고 섭리다.
목하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후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거의 비상상황에 처해 대책을 마련하느라 노심초사하는 판이다. 우리나라도 물론 예외가 아니다.
그런 엄중한 시국에 백성을 위해 내 한 몸 바치겠다며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나랏님들이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군림하며 죽기살기로 정쟁에만 몰두할 일인가.
그들이 김장독의 배추처럼 연하고 부드럽게 상대방과 화합하면서 진정으로 민생을 살펴 백성의 입맛을 돋우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녕 연목구어일까.
상념 속에 갑진년 동짓달의 마지막 밤이 깊어간다.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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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k
2024.12.01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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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민거사
2024.12.01 23:57
별 말씀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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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sy
2024.12.01 08:17
저는 첫눈이 와서 좋아라만 했는데
희비가 엇갈리는 날이었습니다.ㅠㅠ
눈 피해가 빨리 수습되길 바랍니다. -
우민거사
2024.12.01 23:59
감사합니다.
소나무를 일단 일으켜세웠습니다.
생사는 하늘에 맡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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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텃골
2024.12.01 08:57
김장하셨어요?
손수 기를 무와 배추로?
낭만 가객 .
배추 뽑고 무우 썰며
또 하나의 시를 쓰시는 법관님.
그 모습이 또 한 편의 시입니다. -
우민거사
2024.12.02 00:01
에이, 시라니요~
촌부의 그냥 평범한 삶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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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
2024.12.01 13:03
김장독 김치에서도 인생의 교훈을 얻네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우민거사
2024.12.02 00:02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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