뽑고 나서 돌아보면

2025.06.21 23:34

우민거사 조회 수:76

 

     오늘이 하지(夏至)다. 1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날이다. 서울을 기준으로 하면 해가 오전 5시 11분에 떠서 오후 7시 56분에 지니 낮 시간이 무려 14시간 45분이다.

     하지의 일출(日出)을 볼까 하고 새벽에 우면산을 올랐지만 허사였다. 평년보다 일찍 시작한 장마로 어제부터 종일 비가 내리고 오늘 새벽에도 구름이 짙게 깔리고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기야 옛 속담에도 “하지가 지나면 구름장마다 비가 내린다”고 했으니, 작금에 비가 내린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다. 

 

   장마전선이 남부지방으로 잠시 내려간 덕분에 오후부터는 비가 긋고 이따금 맑은 하늘이 보였다. 그래서 서둘러 금당천의 우거로 내려왔는데, 지난 주말에 손주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느라 거른 까닭에 2주 만에 오니 걱정했던 대로 집안이 밀림이 되었다. ‘한여름 풀은 뽑고 나서 돌아서면 바로 다시 난다’고 할 정도로 번식력이 대단하다. 

 

   판소리 흥보가 중 흥보가 박을 타니까 박속에서 쌀과 돈이 든 궤짝이 나와 그 쌀과 돈을 쏟아붓는 대목에,

“쌀과 돈을 떨어 붓고 닫혀놨다 열고 보면 도로 하나 그뜩하고, 톡톡 떨고 돌아섰다 돌아보면 도로 하나 그뜩하고, 떨어 붓고 나면 도로 수북, 떨어 붓고 나면 도로 그~뜩, 아이고 좋아 죽겄다~”

라는 사설이 나온다. 

   우거의 풀이 꼭 이것과 같아,

“풀을 뽑고 일어나서 던져놓고 돌아보면 도로 하나 나와 있고, 애써 뽑고 돌아섰다 돌아보면 도로 하나 나와 있고, 뽑아놓고 나면 도로 삐쭉, 뽑아놓고 나면 도로 가~득, 아이고 질려 죽겄다~”이다.

이쯤 되면 거의 풀과의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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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이 한순간에 끝날 일이 아닌지라 2차전은 내일 오전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일단 휴전을 선언했다.  숨을 돌린 후 매화나무에 주렁주렁 열려 있는 매실을 땄다. 지난해에 비해 많이 달렸다.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해를 걸러 가며 많이 열렸다 적게 열렸다 한다. 매실을 따서 씻어 놓는 것까지만 촌부의 몫이고, 이것을 이용해 매실청을 담그는 것은 집사람 소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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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 뽑으랴, 매실 따랴, 과부하가 걸린 허리를 펼 겸 금당천으로 나가니 비로 물이 늘어난 개울에서 백로들이 제철을 만난 듯 노닌다. 개울에 물이 불면 물고기가 많아져 백로들에게는 좋은 먹거리를 쉽게 챙길 수 있는 장이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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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에는 비가 와서 개울에 물이 불면 미꾸라지, 붕어, 피라미 같은 물고기를 잡으러 족대를 둘러메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먹거리 시장을 빼앗긴 백로한테 가히 원망의 대상이었을 텐데, 그때는 그런 생각을 전혀 못 했다. 하긴 그런 생각을 할 나이도 아니었다.

   내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입장도 배려하는 것의 중요성은 새삼 말할 나위가 없지만, 그것도 다 때가 있기 마련이고, 그 때가 되면 마땅히 그리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지난 연말의 뜬금없는 비상계엄이 촉발한 탄핵과 그에 이어진 조기 대통령선거가 6월 3일에 끝나고 제21대 대통령이 곧바로 취임했다. 아직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각 부처의 장관이 임명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그래도 일단 6개월간의 정정(政情) 불안 상태는 어느 정도 진정된 모양새다. 

 

   비록 50%에 못 미치는 득표율로 당선되긴 했지만, 지지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새 대통령의 취임 일성이 그대로 지켜지길 기대해 본다. 

 

   그런데 새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집권 여당이 압도적인 의석수를 내세워 3가지 종류의 특검 법안을 일사천리로 밀어붙였는바, 법안의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우선 그 수사에 무려 총 120명이나 되는 검사를 동원하는 것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들려온다. 검찰청을 없애고 검사의 수사권을 완전히 없애겠다고 목청을 높이는 집권 여당의 방침과도 부조화가 아닐는지. 

 

    일단 보류되긴 했지만, 사법제도의 근간과 연결되는 것임에도 깊은 검토 없이 대법관의 숫자를 30명으로 늘리겠다는 법안, 반대 여론이 더 많음에도 대통령에 대한 형사재판은 임기 중 일체 중지한다는 법안, 불법 파업을 조장할 우려가 계속 제기되고 있는 이른바 ‘노란봉투법안’ 등도 같은 상황이다. 

   

   논어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바탕이 겉모습을 넘어서면 거칠고, 겉모습이 바탕을 넘어서면 형식적이게 된다. 겉모습과 바탕이 잘 어울린 후에야 군자답다[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질승문즉야 문승질즉사 문질빈빈 연후군자)]”

    요컨대 군자는 모름지기 내면의 깊이와 외면의 품격이 서로 잘 어우러져야 한다는 것이다. 

 

    겉으로 내거는 구호와 실제로 드러나는 행동이 따로 놀지 않고 서로 일치하는 위정자가 되는 것이야말로 특정 지지자들만이 아닌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는 요체가 아닐까.  충성 경쟁을 벌이느라  온갖 강성발언을 쏟아내는 사람들에 휩쓸려서는 본인의 희망대로 될 수가 없다. 

 

   어릴 적부터 지난한 삶을 살아온 새 대통령은 지난 총선 때의 '비명횡사'라는 말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그동안 남을 배려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정의 최고책임자이자 권력의 정점에 있는 지금은 다르다. 

    내 생각만 고집하지 않고 남도 배려하는,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문질(文質)이 빈빈(彬彬)한 위정자가 되길 기대한다. 그것이 연목구어(緣木求魚)가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을사년 하지의 밤이 개구리 울음 속에 속절없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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