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중(百中), 백로(白露), 백로(白鷺)

 

 

   어제가 백중(百中)이었고, 오늘이 백로(白露)다. 그리고 금당천의 백로(白鷺)는 따뜻한 남쪽으로 떠날 준비를 한다. 

 

   본래 백중(百中)은 음력 7월 15일이기 때문에 보통 양력으로 8월 중순 무렵인데, 올해는 유월에 윤달이 드는 바람에 한 달 늦어졌다.

 

   지금은 보기 어려운 풍습이지만, 백중날 농촌에서는 한여름 바쁜 농사를 끝낸 머슴들의 수고를 치하하며 하루 휴가와 돈을 주었다. 머슴들은 그 돈으로 장에 가서 술도 마시고 음식을 사 먹고 물건을 샀다. 그래서 ‘백중장(百中場)’이라는 말이 생겼다.

   취흥에 젖은 농부들은 농악놀이를 하면서 하루를 즐기기도 하고 씨름판을 벌이기도 했다. 아무튼 여름 농사를 끝내고 가을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백로5.jpg[밀양 백중놀이.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자료사진]

 

   백중은 절에서는 또 다른 의미로 중요한 명절이다. 이날은 부처님(지장보살)이 지옥문을 열고 심사를 하여 회개를 한 사람들을 구원해 주는 날이다.

   불가에서는 백중을 우란분절(盂蘭盆節)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조상 영가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천도(薦度) 의식인 우란분재(盂蘭盆齋)를 지내는 날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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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로(白露)는 “흰 이슬”이라는 뜻으로, 절기상으로 백로가 되면 밤에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풀잎이나 물체에 이슬이 맺힌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지어졌다.

   마침내 더운 여름이 물러가고 가을의 기운이 완연히 나타나는 시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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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로(白露)가 되어 가을 기운이 완연해지기 시작하면 금당천의 백로(白鷺)는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난다. 그리고 내년 봄이나 되어야 다시 돌아온다.

   그 백로(白鷺)가 떠난 빈자리를 머지않아 북쪽에서 날아온 기러기가 채울 것이다. 그래서 판소리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의 사설 한 구절처럼, 동방에 실솔(蟋蟀) 울어 깊은 수심 자아내고 창공에 홍안성(鴻雁聲)이 먼 데 소식을 전해오리라. 

 

   그나저나 백로(白鷺)는 금당천이 춥다고 떠나가는데, 기러기는 따뜻하다고 찾아오니, 금당천은 추운 곳인가, 더운 곳인가, 아니면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곳인가.

   추운 줄도 모르고 더운 줄도 모르고 마냥 같은 자리에 있는 촌부만 계절의 변화를 모르는 둔자(鈍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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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월에 든 윤달로 인해 백중(百中)과 백로(白露)가 하루 차이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것이나, 백로(白露)가 되어 백로(白鷺)가 떠나가는 것이나, 시절의 흐름에 따른 자연현상이다. 누가 있어 그 흐름을 막으랴. 

  비록 올해는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일기예보상으로는 백로에도 낮 최고기온이 전국적으로 30도 안팎이지만, 그런다고 오던 가을이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금당천변의 논들이 서서히 황금빛으로 바뀌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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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절이 이러하니 촌부도 가을맞이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화단의 밀림처럼 무성해진 잡초들을 제거하고, 호박, 오이, 가지, 고추 등을 심었던 채소밭도 거둘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해서 정리했다.   

 

  가을을 맞이하는 것에 더하여 월동(越冬)을 준비하기 위해 지난주에 심은 김장배추 모종이 잦은 비에 눈에 띄게 자라고, 씨를 뿌린 무도 싹이 올라왔다. 주중에 제대로 돌보지 못해 미안한데, 이처럼 자라 주는 게 대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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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는데도 집 안팎을 정리하는 데 한나절이 걸렸다. 허리를 펼 겸 찻자리에 앉았다. 오늘의 차는 오랜만에 우리나라 홍차를 골랐다.

   보성의 원당제다원에서 손으로 만든 “서리꽃이 핀 차”이다. 차의 색깔과 향과 맛이 나무랄 데가 없다. 이 정도의 홍차라면 세계 3대 홍차(다즐링, 우바, 기문)와 견주어 빠질 게 없을 것 같다. 녹차 위주로 형성된 우리나라 차시장에 드물게 나온 홍차라 더욱 반갑다.

 

   목하 각 분야에서 K-문화가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 만큼 한국의 차(茶)도 그 반열에 오르면 오죽 좋을까. 앞으로의 발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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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세시풍속이 변하고, 산천의 모습이 바뀌는 게 섭리다. 그 변화에 비록 작은 돌출이 있을지언정 큰 흐름은 자연스럽고 무리가 없다.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게 마련이다. 그게 하늘의 뜻이다. 누가 있어 이 뜻을 거스르랴. 고래로 순천자(順天子)는 흥하고 역천자(逆天子)는 망하는 법이다. 

 

   국내 국외를 막론하고 한반도를 둘러싼 작금의 혼란스런 모습이 과연 순천자(順天子)의 길로 갈는지, 아니면 역천자(逆天子)의 길로 갈는지 촌노의 둔한 머리로는 알 길이 없다.

   백중(百中)에 즈음하여 촌노는 그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도할 뿐이다.          

 

03-슈만 피아노협주곡a단조op.54-3.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