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모습 :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2025.07.19 20:17
내일(7.20.)이 초복(初伏)이다.
아직은 장마철에 속하는 6월 말부터 일찍 찾아온 폭염으로 인해 7월 초에 서울의 낮 기온이 38도를 오르내렸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1908년 근대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7월 초에 전국적으로 이렇게 더운 날씨가 이어진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1
그 와중에 에어컨까지 고장 나는 통에(7.10.) 찜통더위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삼성전자서비스센터에 수리 요청을 했더니 무려 20일을 기다리란다. 지금 찜통더위가 계속되고 있는데 어떻게 20일을 기다리라는 것이냐고 하소연해도 오불관언(吾不關焉)이다. 그나마 20일 후도 제일 빠른 날짜이니 예약 등록을 하든지, 아니면 말라는 것이다.
구입한 전자제품의 수리(A/S)를 요청하면 득달같이 달려와 문제를 해결해 주던 과거 국민기업 삼성전자의 모습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이제 삼성전자는 국내뿐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활동하는 기업이 되었는지라, 시장이 좁은 국내에서는 소비자인 국민을 최우선시하는 것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 것일까.
도리없이 인터넷을 검색하여 사설 수리업체에 전화를 했더니 젊은 수리기사가 밤 11시에 달려왔다. 에어컨 수리 요청이 많아 밤낮없이 일하느라 그렇게 늦은 시각에 왔다고 한다. 비록 50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해야 했지만, 무더위 속에서 고생하는 고객들을 생각하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그 기사의 서비스 정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래는 이런 것이 촌부의 머릿속에 기억되는 삼성전자의 본모습이었는데...
목하 삼성전자가 인공지능(AI) 기능을 도입하고 강화한 각종 가전 신제품을 연일 쏟아내고 있는데, 첨단기술을 도입한 제품을 시장에 내놓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이 고장 났을 때 적시에 수리를 해주는 사후관리 서비스(A/S)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사상누각(沙上樓閣)일 뿐이다.
에어컨 하나 수리가 늦어지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난리를 치냐고 할 수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한비자(韓非子)의 말처럼,
천장 높이의 둑도 개미구멍으로 인해 무너지고(千丈之堤 以螻蟻之穴潰. 천장지제 이누의지혈궤), 백 척짜리 큰 집도 굴뚝 틈에서 나온 불똥으로 인해 타버리는(百尺之室 以突隙之烟焚. 백척지실 이돌극지연분)
것이다.
불현듯 작금의 언론에 종종 등장하던 삼성전자의 위기설이 겹쳐져 씁쓸하다. 마침 제헌절이었던 지난 17일에 그동안 무려 9년에 걸쳐 삼성의 이재용 회장을 옥죄던 사법 족쇄가 대법원의 무죄판결로 풀렸다.
어느 신문의 그 다음날 사설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제는 더 이상 ‘우리가 알던 삼성이 어디 갔느냐’는 소리가 나오지 않게 국민기업 삼성의 본모습을 회복하여 다시 우리나라 경제의 견인차가 되길 기대한다.
2
때 이르게 그렇게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이번 주 들어 비가 오면서 한풀 꺾였다. 지난 며칠 동안은 장맛비가 제대로 내렸다. 충남 서산에는 16일, 17일 이틀 동안에 무려 519mm의 폭우가 쏟아졌다. 이게 우리나라 여름철 장마의 본모습이 아닐까.
곳곳에서 하천의 수위가 올라가 범람을 우려하는 뉴스가 전해진다. 비가 잠시 그친 틈을 이용하여 금당천에 나가보니 이곳 역시 물이 많이 불었다. 하지만 높게 쌓은 튼튼한 제방 덕분에 넘칠 염려는 없다.
장맛비로 더위가 꺾이는 바람에 내일이 초복(初伏)이라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 급변하는 날씨 탓에 계절의 감각을 잃을 판이다.
복날의 ' 복(伏)' 자는 ' 엎드릴 복'으로서, 복날은 글자 그대로 선선한 기운이 더운 기운 앞에 엎드리는 날이다. 그런 만큼 복날은 더워야 복날로서의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일기예보를 보면 내일 초복은 날씨가 선선하여 복날 같지 않은 복날이 될 듯하다. 이는 복날의 본모습이 아니다. 그 바람에 복날 삼계탕 한 그릇에 땀을 훔치며 더위를 이겨내던 일이 추억으로나 남을 듯하다.
3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새 정권이 들어서서 정치판이 한창 새로 짜이고 있다. 새 대통령은 경제 회복을 위해 기업을 적극 지원하겠다며 탈이념의 실용정치를 외치고 있는데, 여당이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국회에서는 이념에 경도되어 기업을 옥죄는 법안들이 계속 상정, 통과되고 있고, 곧 열릴 전당대회에서 당대표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들은 경쟁적으로 강성발언을 토해 내고 있다. 심지어 인사청문회에 참석한 어느 장관 후보자는 기업들이 가장 염려하는 노란봉투법의 제정을 공언하고 있다. 이쯤 되면 새 정권의 진정한 본모습이 무엇인지 헷갈린다.
한편 느닷없는 계엄의 여파로 정권을 내놓고 졸지에 찬밥 신세로 전락한 제1야당은 당의 혁신을 둘러싸고 갈팡질팡이다. 국민의 따가운 눈초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심한 장면을 거푸 연출하고 있다.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20% 아래로 떨어져도 모르쇠로 일관한다.
더구나 일부 의원들은 탄핵으로 파면당한 후 당을 탈당한 전직 대통령을 여전히 감싸고 추종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이 더 폭망해야 정신을 차릴 것이라는 극단적인 이야기도 나온다. 전통적으로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외쳐온 보수 정당의 본모습이 아니다.
4
불가(佛家)에 ‘운재청천수재병(雲在靑天水在甁)’이라는 화두가 있다.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병 속에 있다는 것이다. 구름이 하늘이 아닌 병 속에 있을 수는 없다(雲在靑天不在甁). 그것이 자연의 본모습이자 당연한 섭리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듯이. 그런데 이즈음 그 당연한 이치가 자꾸 망각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대저 범사(凡事)에서 본모습을 잃고 배가 산으로 가는 일이 벌어지는 것을 경계할 일이다.
밤이 깊어가는데 우거(寓居)의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요란하여 잠들기가 어려우니 어쩔거나. 이 또한 한여름 밤의 본모습이런가.
(추록)
초복날에 아침에는 선선했는데, 해가 나더니 금방 찌는 더위가 다시 찾아왔다. 요새 날씨 정말 예측키 어렵다.
아랑훼즈 협주곡 2악장 Adagio-5-Jozef Zsapka.mp3
(아랑훼즈 협주곡 2악장 Adagio-5-Jozef Zsapka)
댓글 6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 |
본모습 :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6] ![]() | 우민거사 | 2025.07.19 | 128 |
360 |
뽑고 나서 돌아보면
[4] ![]() | 우민거사 | 2025.06.21 | 107 |
359 |
백로에게 무슨 죄가 있나
[8] ![]() | 우민거사 | 2025.05.24 | 473 |
358 |
평범함 속의 위대함
[4] ![]() | 우민거사 | 2025.04.26 | 462 |
357 |
오플레이(O’Play) ‘파우스트’
[6] ![]() | 우민거사 | 2025.04.15 | 391 |
356 |
약사전에 내린 서설(瑞雪)
[8] ![]() | 우민거사 | 2025.03.30 | 530 |
355 |
쿠오 바디스(Quo vadis)?
[5] ![]() | 우민거사 | 2025.02.15 | 485 |
354 |
아는 만큼 보이지 않아도 좋으니
[8] ![]() | 우민거사 | 2025.01.26 | 560 |
353 |
팥죽 먹기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하나
[4] ![]() | 우민거사 | 2024.12.21 | 562 |
352 |
솔 위에 내린 눈이
[8] ![]() | 우민거사 | 2024.11.30 | 577 |
여전히 뉴스를 보며 흘러가는 세월도 보고 계시는 군요.
나라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증표이시네요.
전 걍 외면하고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