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노래가 되고
2025.11.26 22:57
어느새 11월의 끝이다. 그 끝에 지난 한 달을 돌이켜 보면, 가을 날씨와 초겨울 날씨가 냉·온탕을 오가듯 반복되는 통에 가을 같지 않은 가을을 보낸 느낌이다. 뒤늦게 든 단풍이 절정을 이룬 것도 입동(立冬)을 한참 지난 소설(小雪)을 전후한 무렵이다.
독서의 계절 내지 문화의 계절로 불리는 가을이 헷갈리는 날씨만큼이나 어지러운 각종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들로 인해 전반적으로 계절값을 제대로 못한 채 지나가 버렸다. 그런 아쉬움 속에 공연장을 몇 군데 찾았다.
1. “완벽함이란, 완벽한 순간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2025. 10. 31.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울시발레단이 공연한 컨템포러리(contemporary) 발레인 한스 판 마넨의 ‘캄머 발레(Kammerballett)’와 허용순의 ‘나무의 소리 아래에서(Under The Trees’ Voices)‘를 관람했다.
컨템포러리 발레 관람은 지난해 여름에 서울시 발레단의 창단 공연인 “한여름 밤의 꿈”을 본 것이 처음이었고, 이번이 두 번째이다.

그동안 전통적인 고전발레(=클래식 발레)에만 익숙해 있던 촌부에게 지난해 처음 접한 ‘컨템포러리 발레’는 문화적인 충격이었다.
그러나 촌부의 식견이 일천하여 그동안 몰랐던 것일 뿐, 알고 보니 20세기 초부터 이미 고전발레의 형식주의에 반발해 자유로운 표현을 추구한 춤이 ‘모던 발레’로 불려 왔고, 1980년대에는 ‘컨템포러리 발레’라 불리는 발레가 등장하였다.
다만, 컨템포러리 발레는 내용 면에서 모던 발레와 별반 다르지 않아 양자가 혼용되기도 하며, 모던 발레에 비해 ‘동시대성(同時代性, contemporary)’의 의미가 강조되기도 한다. 그래서 단적으로 ‘지금 여기의 이야기로 춤을 추는 발레’라고 정의된다(이 정의의 당부<當否>를 논하는 것은 촌부의 능력을 벗어난다)..
한국과 네덜란드의 국립발레단에서 수석무용수로 활동한 김지영 경희대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스토리가 있는 클래식 발레는 정답이 있는 셈이지만, 컨템포러리 발레는 정답이 없기 때문에 관객이 자유롭게 느끼면 된다. 처음엔 어려울 수 있지만 움직임에만 집중하다 보면 무용수의 매력이 더 잘 드러난다.”(국민일보 2025. 4. 18.자)
각설하고,
지난 10. 31. 세종문화회관의 불빛 아래, 시간은 잠시 멈추고 몸이 음악이 되었다. 김지영, 강효정 무용수의 절제된 몸짓이 빚어낸 긴장과 여백은 깊은 울림을 남겼다.
그들의 열정적인 동작은 인간과 자연, 관계와 고독, 그리고 함께함의 의미를 담아냈다. 그 위에 흐르는 에지오 보쏘(Ezio Bosso)의 음악은 우리에게 ‘듣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교향곡 ‘나무의 소리 아래에서(Under The Trees’ Voices)‘를 작곡한 에지오 보쏘(Ezio Bosso)는 말한다.
“이 세대는 모두 말을 하는데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음악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 바로 듣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완벽함이란, 완벽한 순간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그 순간을 붙잡아 완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각형 의자 위에서 구현되는 인간관계 안에서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 음악과 몸은 서로를 비추며 불완전 속에서 완벽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나무의 가지와 잎처럼 뻗어나갔다 흩어지고 다시 모임으로써 자연의 순환과 인간의 삶과 죽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무용수들의 몸짓은, 예술이란 완성된 하나의 완벽한 장면이 아니라 함께 숨 쉬는 찰나의 진실임을 일깨워 주었다.

2. “오, 땅이여 안녕(O terra addio)”
2025. 11. 14. 다시 세종문화회관에 서울시오페라단의 창단 40주년 기념공연인 “아이다(Aida)”를 보러 갔다.
이날 가을빛이 내려앉은 세종문화회관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예술이었다. 무대가 올려지자 현실의 시간은 서서히 멀어지고 고대 이집트의 모래바람이 무대 위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베르디의 아이다는 사랑과 조국, 인간의 존엄을 향한 질문을 장대한 음악 속에 새겨 넣은 영원의 서사시다. 전쟁과 사랑, 질투와 희생의 이야기 속에서 각 등장인물의 갈등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인간의 진면목을 고스란히 투영하였다.

2막의 귀에 익숙한 개선행진곡이 울려 퍼질 때, 금관의 화려한 빛은 무대를 넘어 객석까지 흔들었다. 승전을 축하하는 화려한 장면이 이어지는 가운데도, 그 이면의 선율 깊은 곳에서는 전쟁의 그림자와 인간의 비애가 아른거렸다. 장엄한 합창 뒤편에 숨은, 피로 얼룩진 역사와 무수한 희생이 크게 다가왔다.
이 오페라의 핵심은 정작 2막의 이와 같은 웅장한 장면이 아니라, 3막에서 그려지는 아이다, 라다메스, 암네리스, 이 세 사람의 삼각관계, 그리고 그 미묘한 관계 속에서 그들이 겪는 마음속 고통에 찬 갈등에 담겨 있었다.
조국(이디오피아)을 위해 헌신하지만 끝내 사랑(라다메스)을 버릴 수 없어 죽음의 길을 따르는 아이다(이디오피아 공주),
조국(이집트)을 배신하고 사랑(아이다)을 선택한 대가로 죽음을 맞이하는 라다메스(이집트 장군),
조국을 배신한 라다메스를 여전히 사랑하면서 회한 속에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암네리스(이집트 공주),
이들의 심적 고뇌가 마음 깊이 절절히 전해졌다.

4막 마지막 장면의 이중창 “오, 땅이여 안녕(O terra addio)”-- 절제된 오케스트라 위로 “세상은 우리를 갈라놓았지만, 죽음은 우리를 영원히 이어준다”는 아이다와 라다메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조용히 포개질 때, 그것은 비극의 끝이 아니라 모든 경계를 뛰어넘는 숭고한 사랑의 결정체가 되었다.
‘사랑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예술은 무엇으로 우리를 흔드는가’를 새삼 생각하게 하는 깊은 여운을 남긴 공연이 끝나고, 세종문화회관을 나서며 우리나라 오페라의 역사를 다시 쓰는 서울시오페라단의 저력에 새삼 감탄했다.
출연진이 200명이 넘는 대작인 이번 아이다 공연은 전통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적 감성과 현대적 해석을 더해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열었다. 단순한 공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오페라가 세계로 뻗어가는 품격 있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컨템포러리 발레와 대작 오페라를 감상함으로써 문화적 안목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신 세종문화회관의 안호상 사장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3. “소리로 다 허는 거여. 기쁘나 슬프나 원통허나 애통허나 그걸로 풀고 사는 거여”
2025. 11. 3. 국립정동극장에서 서편제 소리극을 보았다. 이청준 원작의 서편제는 그동안 영화(1993)로, 창극(2013)으로, 뮤지컬(2010)로 여러 차례 무대에 올려진 작품이다.
영화 서편제는 당시 ‘단성사’ 단일 극장에서 1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은 명작으로, 청룡영화상, 대종상, 백상예술대상에서 처음으로 전부 최우수작품상을 받는 기염을 토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촌부는 이 영화가 계기가 되어 판소리를 알고 배우게 되었고, 한걸음 나아가 임권택 감독님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당시 촌부는 이 영화를 4번 보아 영화 속 주요 대사들은 외울 정도였다.

그 서편제가 최대한 원작을 살린 소리극(제목이 ‘서편제 : The Original’)으로 재탄생하여 무대에 올려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국립정동극장을 찾았다. 국립정동극장 개관 30주년 기념작으로 3년 전부터 준비해 야심차게 올린 것이다.
‘눈먼 딸’과 ‘광적인 아비’라는 원작 소설 특유의 비극과 애잔함을 무대 위에서 생생히 드러냄으로써, 소리극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감동과 힘을 재확인케 하였다. 지금도 판소리를 배우고 있는 촌부에게는 장면 하나하나가 실감나게 다가왔고, 때로는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감쌌다.

누군가는 이 소리극을 본 감상을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짧으면서도 소리극 서편제의 진수를 담아낸 이 시에 깊은 공감이 간다.
달빛 고운 돌담길
그 길 위에
한이 흘러 소리가 되었다
아비의 숨결
소녀의 눈빛
바람에 실려 멀리 간다
슬픔은 노래가 되고
고통은 빛이 되어
밤하늘에 번진다
길은 끝나지 않았다
오늘도 누군가
그 소리를 따라 걷는다
이 소리극에서는 영화와 달리 유봉은 ‘아비’로, 송화는 ‘소녀’로, 동호는 ‘사내’로 지칭되었지만, 이들이 맡은 역할은 소설이나 영화와 다를 바 없다. 앞으로도 서편제가 어떤 형식으로 무대에 올려진들 세 주인공을 중심으로 엮어가는 기본틀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 극이 진행되는 동안 출연자들(그들은 대부분 판소리 전공자들이다)이 모두 22편의 소리(판소리 중 눈대목, 단가, 민요, 한승석 음악감독의 작창곡 등)를 하는데, 촌부는 ‘아비’ 역을 맡은 임현빈 명창(현재 남원시립국악단 악장)의 깊고도 우렁찬 상청 소리에 특히 매료되었다. 향후 그의 활약이 기대된다.

4. “너답게, 나답게, 버텨라, 살아라.”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오락가락하고, 오색 단풍이 뚝뚝 떨어지며 멀어져 가는 가을의 마지막 숨을 뿜어내던 2025. 11. 27.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을 찾았다. 창극 “이날치전”을 보기 위함이었다.
이 창극은 조선 후기 8명창(박유전, 박만순, 김세종, 이날치, 송우룡, 정춘풍, 정창업, 김찬업) 중 한 명이자, 날쌔게 줄을 잘 탄다고 하여 ‘날치(捺致)’라 불린 이경숙(1820-1892) 명창의 삶을 소재로 한 것이다.
2024년 초연 당시 전통연희와 판소리가 어우러진 유쾌한 무대로 호평을 받으며 객석 점유율 99%를 기록하였는데, 1년 만에 다시 다시 올려진 무대도 연일 매진의 성황을 이뤘다.
촌부는 현존 최고의 남자 명창이신 왕기철님이 어렵사리 구해주신 표로 객석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왕명창님께 새삼 감사를 드린다.

이 창극에서는 이날치가 양반집 머슴으로 태어나 줄광대로 활동하다 명창 박만순의 고수(敲手)로 들어가 온갖 수모를 견디며 귀동냥으로 소리를 익힌 끝에 명창이 되어 어전광대(御殿광대. 임금 앞에서 소리를 한 명창)의 반열에까지 오르는 과정을 실감나게 풀어냈다.
주인공이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 자신의 운명을 어렵게 스스로 개척해 가는 모습이 애절하면서도 깊은 감동을 주었다.
막이 오르자마자 줄 위를 가볍게 넘나드는 줄광대의 묘기가 숨결 하나까지도 긴장으로 감싸며 관객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소리판은 이날치가 걸어온 삶의 굽이굽이와 그의 신명, 그의 한을 그대로 담아낸 거대한 파도 같았다.
머슴에서 명창으로, 흔들리고 패배하고 다시 일어서며, 삶의 판을 스스로 뒤집은 이날치의 생은 그 자체로 살(生)판과 살(殺. 死)판이 맞닿아 있는 한 편의 서사였다.

160분 동안 무대 위 40여 명 출연자들의 혼이 시간을, 공간을, 신분의 벽을 넘어 흘렀다. 무등산 계곡과 운현궁이 구현된 LED 무대, 풍물놀이, 재담, 탈춤의 전통연희에 ‘범 내려온다’의 현대적 리듬을 가미한 놀이판은 그 자체로 신명 나는 하나의 굿판이었다.
트롯 경연대회의 오디션을 방불케 하는 통인청대사습놀이 장면에서 네 명의 명창들(김세종, 박유전, 박만순, 송우룡)이 번갈아 부른 춘향가·심청가·적벽가·수궁가의 각 눈대목은 소리 한 자락에도 삶을 던진 사람들의 숨결과 기개를 피부로 느끼게 했다.

극의 끝부분에서 심청가 중 '물에 빠지는 대목'(심청이가 인당수로 몸을 던지는 대목)에서 이날치가 온몸을 던져 내지르는 소리는 목숨을 불사르는 듯한 절규였다.
촌부의 눈에서는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다. 이것은 그 어떤 외국 음악도 흉내 낼 수 없는, 우리만의 한과 흥이 겹겹이 쌓인 정서였다.
이 극에서 판소리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시대를 건너 이 땅의 민초들이 흘린 눈물과 희망, 기쁨과 비애의 기록이었고, 우리 가슴 밑바닥 어딘가에 흐르고 있던 원형의 울림이었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오락가락했던 이날, 공연이 끝나고 달오름극장을 나서는 발걸음 위로 극 속의 처절한 외침이 따라와 머물렀다.
“견디자 살 판, 버티자 죽을 판, 모자라도 괜찮다, 서툴러도 괜찮다! 너다워지자! 나다워지자!”
그것은 가슴 속 살(生)판이 되는 외침이었다.
이날치역을 열연한 명창 이광복님과 줄타기의 묘기를 보여준 명인 남창동님께 박수를 보낸다.
(사족)
국립정동극장 공연된 서편제 소리극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된 이날치전 창극에서는 출연진들의 대사와 소리가 영어 자막으로 제공되었다.
판소리가 2003년 유네스코의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그 전에 이미 1964년에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될 정도로 예술적, 문화적 가치가 있고, 이제는 외국인 명창이 나올 정도로 대외적으로도 관심이 많은 만큼, 영어 자막 제공은 가히 칭찬할 일이다.
댓글 6
-
김텃골
2025.11.27 11:40
-
우민거사
2025.11.28 21:44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습니다.^^
-
김텃골
2025.11.29 06:54
오늘 다시 읽어 봅니다.
"예술이란 완성된 하나의 완벽한 장면이 아니라 함께 숨 쉬는 찰나의 진실임을 일깨워 주었다."
ㅡ우민거사 글 중에서ㅡ
무릅을 칩니다. '맞네여' 라며
우리의 삶도 그런 것일 거란 생각도 들고여.
이제 오페라도 K오페라라고 하여 오페라 극단이 유럽 오페라 하우스를 훱쓸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멋진 감상평에 저도 아이다와 서편제 속으로 빠져 듭니다. -
우민거사
2025.11.29 21:48
내년에 다시 공연을 하거든 꼭 보세요~^^
서편제 소리극이나 이닐치전은 아마도 다시 할 것 같습니다.
워낙 인기가 좋거든요.
-
Daisy
2025.11.29 11:52
정말이지 다양한 문화생활을 소화하고 계십니당.
게다가 비평가 못지않은 해설까지… -
우민거사
2025.11.29 21:49
에이, 왜 비행기를 태우시나요.
그냥 촌부의 하찮은 감상일 뿐인 걸요~
|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 368 |
여의강(汝矣江)에 배를 대다
[4] | 우민거사 | 2025.12.06 | 42 |
| » |
슬픔은 노래가 되고
[6] | 우민거사 | 2025.11.26 | 122 |
| 366 |
소설(小雪)과 억새
[6] | 우민거사 | 2025.11.22 | 127 |
| 365 |
2025년 ALB Korea Law Awards 축사
| 우민거사 | 2025.11.08 | 118 |
| 364 |
가을비 그친 뒤에
[4] | 우민거사 | 2025.10.25 | 143 |
| 363 |
양식(糧食) 곳간과 양식(良識) 곳간
[6] | 우민거사 | 2025.09.28 | 132 |
| 362 |
백중(百中), 백로(白露), 백로(白鷺)
[6] | 우민거사 | 2025.09.07 | 183 |
| 361 |
본모습 :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6] | 우민거사 | 2025.07.19 | 220 |
| 360 |
뽑고 나서 돌아보면
[4] | 우민거사 | 2025.06.21 | 187 |
| 359 |
백로에게 무슨 죄가 있나
[8] | 우민거사 | 2025.05.24 | 535 |










유럽 영화를 보다 보면 오페라 하우스에 고전음악을 감상하는 상류층들의 문화 생활.
바로 그 모습이네여.
저런 고급 문화가 있는지 조차 모르고 촌구석에 박혀 사는 이 촌놈에겐 먼 나라 신선처럼 느껴집니다.
참 멋진 생활이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