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롤모델

2026.02.15 23:22

우민거사 조회 수:59

 

    설 연휴가 시작되었다. 설은 한가위와 더불어 민속 고유의 명절인 만큼 언론에서 언필칭(言必稱) ‘민족 대이동’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귀성과 역귀성 인파가 전국의 고속도로를 메운다.

    과거 일제 강점기 이래 1988년까지는 양력 1월 1일을 신정(新正)이라 하여 공식적인 설날로 지정되어 있었고(상대적으로 음력 1월 1일은 구정<舊正>이라 하여 낡은 이미지가 덧씌워지고 폄하되었다), 실제로 이날 설을 쇨 것을 사실상 강요당하다시피 했지만, 1989년에 비로소 음력 1월 1일이 옛날 전통대로 설날로 지정되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설 정통성의 회복”이랄까.

 

    그 설을 잘 쇠라는 게 하늘의 뜻인가보다. 대한(大寒) 전후로 그렇게 맹위를 떨치던 추위가 물러가고 오늘은 낮 기온이 영상 10도를 웃도는 완연한 봄 날씨다. 하긴 입춘이 열흘 전에 지났고(4일), 설 연휴가 끝나면 바로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雨水. 19일)이니 봄기운을 느낀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다. 

 

     그래서 금당천을 찾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일찍이 포은(圃隱) 선생이 읊으신 대로 설진남계창(雪盡南溪漲. 눈 녹은 물이 남쪽 개울에 넘쳐난다)이다. 얼마 전까지 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얼어 있던 개울이 소리를 내며 흐른다.

     개울가의 시들대로 시들었음에도 술이 그대로 남아 있는 갈대가 오히려 다가오고 있는 봄과는 부조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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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5일의 금당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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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의 금당천]

 

설명절3.jpg[갈대]

 

    금당천의 봄빛을 몸으로 받으며 발길을 돌려 우거로 향하려니 어디선가 귀에 익은 새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어 동네 어귀의 숲을 보니, 오호라 왜가리가 벌써 왔네그려! 보통 3월에, 빨라야 2월 말에 찾아오는 철새 왜가리가 날개짓을 하고 있었다. 

 

    아둔한 촌자만 계절의 변화를 모른 채 이불 밑에서 활개 치고 있는 동안에, 개울에도, 숲에도 이미 봄이 와 있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대익(戴益)이 말한 “춘재지두이십분(春在枝頭已十分. 봄은 이미 매화나무 가지에 와 있다)”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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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가리]

  

   “봄 봄 봄 봄 봄이 왔어요~”를 흥얼거리며 우거(寓居)에 들어서는데 마침 때맞추어 지인 한 분이 문자를 보내왔다.

    이탈리아의 ‘밀라노-코티나담페초’에서 열리고 있는 동계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설상(雪上) 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최가온 선수(17세)와 동계올림픽에서 3회 연속 금메달에 도전했다 최가온 선수의 벽에 막힌 미국의 클로이 김(25세. 그녀는 부모가 한국인인 재미동포 2세이다)에 얽힌 이야기였다. 

 

    스노우보드 하프파이프 경기 1차 시기에서 큰 부상을 입고, 2차 시기에서 또 넘어졌음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절뚝거리는 아픈 다리로 3차 시기에 다시 나서 마침내 금메달을 목에 건 최가온 선수,

    불과 17세의 어린 나이에 그런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 그녀의 모습은 아무리 칭찬을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올림픽을 앞두고 훈련 중 왼쪽 어깨 부상을 당했음에도 치열한 선두 경쟁 끝에 최가온에 이어 은메달을 목에 건 클로이 김 또한 인간승리 그 자체였다.

    그녀는 이미 앞선 두 번의 동계올림픽(2018년 평창, 2022년 북경)에서 연속 금메달을 땄고 이번이 3회 연속 도전이었다.

 

    두 선수의 초인적인 불굴의 의지와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감동적이고 의미있는 것은 경기 후의 두 선수의 모습이다. 

 

     최가온이 자신의 3회 연속 금메달 도전을 무산시켰건만 클로이 김은 누구보다도 최가온을 축하해 주었고, 또한 선배로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SNS에서도 최가온에게 "엄청난 축하를 보낸다. 너의 강인함과 정신력은 감동적이었다"며 진심 어린 축하 메시지를 남겼다. 

      이에 최가온은 "언니는 나의 영원한 롤모델입니다.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댓글을 달아 진정한 스포츠맨십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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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가 최가온. 왼쪽이 클로이 김. 오른쪽은 동메달을 딴 오노]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피 말리는 경쟁관계에 있었음에도 나이 어린 두 선수가 보여준 상호 존중과 배려의 감동적인 모습이야말로 가히 올림픽 금메달감이다. 이보다 더 귀한 금메달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감동을 우리나라 위정자들의 모습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까. 오직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고,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야만적인 논리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그들은 이 어린 두 선수들을 보면서도 느끼는 게 전혀 없는 것일까.

    그들이 설 명절을 맞이하여 하는 소리를 들으면 기가 찰 따름이다. 차라리 자기네 하는 행동이 ‘국민의 여망에 부합한다’는 말을 하지나 말든지. 

 

     각설하고, 이젠 그네들의 행동을 왈가왈부하는 것조차 진부해진 판이니,  설에 먹는 떡국의 의미나 살펴볼거나.

 

    떡국은 나이를 먹게 하여 노화를 재촉하는 독극물이니 멀리하여야 한다는 우스개소리도 있지만,

   전통적으로 설날의 떡국은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의미보다는 희고 뽀얗게 새로이 태어나라는 깊은  뜻을 품고 있다. 순백의 떡과 국물로 지난 한 해 동안 쌓인 심신의 때를 말끔하게 씻어 버리고 새해를 정결하게 시작하라는 것이다. 

    즉, 하얀 도화지에 새롭게 한 해를 시작하는 그림을 그리는 마음으로 설날에 떡국을 먹는 것이다.

 

    병오년 설을 맞이하여 묵은 때를 멋고 새롭게 한 해를 설계할 일이다. 

 

Julian Lloyd Webber,John Lenehan-02-Spring Sorrow (Arr. J. Lloyd Webber for cello and piano).mp3

   (Julian Lloyd Webber,John Lenehan-02-Spring Sorr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