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전 한 잔을 앞에 두고

2026.06.27 21:52

우민거사 조회 수:134

        

   올해도 어느새 절반이 지나 6월의 마지막 주말이다. 예년 같으면 장마가 시작되었을 시기인데, 비는 감감 무소식이고 3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만 계속된다.

   세종의 변호사들과 사패산((賜牌山. 해발 552m)을 올랐다. 올해 법원을 나와 세종에 합류한 변호사들을 환영하는 연례산행의 일환이다.

 

   사패산은  조선시대 선조임금이 여섯째 딸인 정휘옹주를 시집 보내면서 사위 유정량(柳廷亮)에게 하사한 산이라고 하여 그렇게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커다란 바위가 통째로 되어 넓직한 산 정상에 서면 뒤로 도봉산과 북한산이 병풍처럼 도열한 경치가 장관이다.

  회룡골로 사패산을 올랐다가 하산길은 도봉산 포대능선을 거쳐 망월사쪽으로 하산(원도봉으로 아어진다)하는 등산로를 택하였는데, 망월사의 영산전 뒤 만장봉 위로 피어오르는 버섯모양의 흰 구름이 하룡점정을 했다.  순간적으로 산행의 피로를 잊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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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을 마친 후, 늘 하던 대로 발걸음을 금당천으로 돌렸다.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때에 산행을 하여 다소 지치기는 했지만, 시절이 시절인 만큼 여차하면 전원(田園)이 장무(將蕪)할 판이라 쉴 여유가 없다.

 

    목하 풋고추가 한창 열리는 반면, 상추는 벌써 반 이상이 녹아버렸다. 울 안의 장미꽃도 이미 50% 이상 졌다. 반면 백합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피기 시작한다. 봉선화나 칸나는 더 기다려야 한다. 연꽃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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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여름은 더운 것이 자연의 순리다. 그 순리에 맞게 꽃들도 피고 진다. 장미가 피었다 지고, 백합이 피고, 봉선화와 칸나가 그 뒤를 잇고...

   물론 비닐하우스 온실을 이용하면 1년 내내 원하는 꽃을 피우고, 또 그것을 상품화할 수도 있지만, 이는 억지춘양일 뿐이다.  그렇게 피운 꽃의 향이 어찌 노지(露地)에서 제철에 맞게 핀 꽃을 따라가랴.

   개나리와 진달래는 봄에 피어야 아름답고, 장미와 백합은 여름에 피어야 제대로 된 향기를 뿜어낼 수 있다. 그게 순리다.

 

   하지를 맞는 금당천은 밤이 되어도 열기가 후끈하다. 대처와는 달리 밤이면 사위(四圍)가 칠흑같이 어두운데, 짝을 찾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요란하다. 밤이 깊었지만 잠이 쉽게 들지 않아 펼친 책장 옆에 놓은 찻잔을 끌어당긴다.. 

 

   차의 명인(名人)이신 여연스님이 손수 덖으신 귀한 첫물차 ‘설아(蔎芽. 청명 전에 차의 새싹을 따 만든 명전<明前>이다)’의 향기가 그 어둠 속에 잔잔히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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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전(明前)의 향기를 맡으며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지은 시 ‘지로(地爐)'에 눈길이 간다.

 

   山房淸悄夜何長(산방청초야하장)

   閑剔燈花臥土床(한척등화와토상)

   賴有地爐偏饒我(뇌유지로편요아)

   客來時復煮茶湯(객래시부자다탕)

 

   산속의 우거는 맑고도 적적한데 밤은 어찌 이리도 긴가

   한가로이 등불 돋우며 흙마루에 누운 채로

   화로에 의지하여 등 따스하게 지내네

   그러다 객이 찾아오면 일어나 다시 차를 끓인다오

 

   김시습의 산방(山房)처럼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면야 더 말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런 손님이 없다고 차를 못 끓일 것은 아니다.

   벗하자고 모여드는 밤벌레와 더불어 차향을 나눈들 어떠랴. 요란하게 울던 개구리의 울음소리마저 잠잠해진 깊은 밤에 찻잔을 기울이노라면,

 

   눈으로 색깔을 즐기고

   코로 향기를 즐기고

   입으로 맛을 즐기고

   귀로 차 따르는 소리를 즐기고

   마음으로 분위기를 즐길 수 있으니

 

이 어찌 좋지 아니한가. 

굳이 다산(茶山) 선생의 표현을 빌린다면 '불역쾌재(不亦快哉)'이다.

  

   객(客)이야 찾아오든 말든, 벽촌의 우거에서 마시는 명전차 한 잔에 만족하여 즐거움이 넘쳐나니(一瓢之茶樂有餘. 일표지차낙유여),  촌부가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라랴. 마침 보름을 이틀 앞둔 둥근 달이 떠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05. 해(日)_아침햇살에 꽃 피어날 때.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