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죽 먹기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하나
2024.12.21 22:53
12월 21일 오늘이 동지(冬至)다. 음력으로는 11월 21일이다.
음력으로 동짓달 중순이니 동지 중에서도 중동지(中冬至)인 셈이다. 동지가 음력으로 11월 초순 무렵이면 애동지, 그믐 무렵이면 노동지(老冬至)라고 한다. 1년 24절기 중 태양력과 태음력을 동시에 결부시키는 특이한 예이다.
1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짧고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날답게 오늘 밤의 길이가 서울 기준으로 무려 14시간 26분이다(일출 오전 7시 43분. 일몰 오후 5시 17분).
워낙 밤이 길다 보니 황진이처럼 그중 한 허리를 베어낸들 흔적도 안 남을 듯하다.
이처럼 밤만 긴가 했더니 추위도 찾아왔다.
올겨울은 이미 연말이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겨울이 온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추위를 그다지 느끼지 못하겠더니, 오늘 갑자기 내려간 수은주에 목이 움츠러든다.
그래도 어제 그 추위를 몰고 온 눈이 빚어낸 설경(雪景)을 보고자 종종걸음으로 금당천을 찾으니 물오리 떼 옆에서 노니는 백로(白鷺)들이 시선을 끈다.
촌부의 누옥(陋屋)이 있는 금당천변은 중부지방 최대의 백로·왜가리 도래지이다. 그래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철새이기 때문에 초봄에 왔다가 늦가을이면 따뜻한 곳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저 백로들도 마땅히 진즉 강남으로 갔어야 하거늘 어찌하여 남아서 이 추위에 물가를 서성이는 것일까. 소위 말하는 ‘철새의 텃새화’ 현상인가.
답도 없고 영양가도 없는 상념에 젖어 발걸음을 옮기다 우거(寓居)로 돌아와 빗자루를 들었다. 울안 뜰에 적지 않게 내린 눈을 치우는 손끝이 장갑을 끼었음에도 시리다.
젊어서는 눈이 오면 괜스레 즐겁고 신이 났는데, 세월의 흐름에 몸이 따라가는지 울안에 눈이 내리면 이제는 신이 나기에 앞서 치울 걱정을 먼저 하게 된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오면 낙목한천(落木寒天) 찬 바람에 백설만 펄펄 휘날리어 은세계가 되고 보면은 월백설백천지백(月白雪白天地白)하니 모두가 백발의 벗이로구나. 무정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이 내 청춘도 아차 한번 늙어지면 다시 청춘은 어려워라.”
판소리 단가 ‘사철가’의 한 대목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늙기를 거부하려고 몸부림치는 억지일 뿐이다. 고희(古稀)가 되어 청춘 운운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겨울이 되면 춥고 눈이 내리고, 강아지는 꼬리를 치며 좋아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노인의 눈에는 시름이 깊어가는 게 자연의 섭리이다. 그래서 시인은 노래한다.
破屋凄風入(파옥처풍입)
空庭白雪堆(공정백설퇴)
愁心與燈火(수심여등화)
此夜共成灰(차야공성회)
허름한 오두막에 스산한 바람 스며들고
빈 뜰에는 흰 눈이 쌓여 가는데
시름겨운 이 내 마음은 등불과 더불어
이 밤을 함께 태워 재가 되누나.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의 시 ‘雪夜獨坐’(설야독좌. 눈 오는 밤 홀로 앉아)
촌부는 어릴 적에 부모님과 떨어져 할아버지·할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그 때 동짓날이면 할머니가 팥죽을 쑤어 먼저 마루, 장독대, 대문간 등 집안 곳곳에 한 그릇씩 떠 놓고 치성을 드린 후에 방안에 둘러앉아 팥죽을 먹었다. 붉은색 팥죽이 역귀(疫鬼)를 물리친다고 믿었다. 그게 우리의 풍습이었다.
알량한 지식을 내세워 그걸 미신이라고 터부시한다면 그야말로 단견(短見)이다. 이제는 도시화와 아파트 주거문화의 보편화로 일반 가정집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풍경이 된 게 아쉽다.
비록 진관사의 스님이 보내주신 팥죽을 맛있게 먹긴 하였지만,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신 할머니의 팥죽이 새삼 생각난다. 어느새 촌부가 그 할머니의 나이가 되었음에도 말이다.
작금에 주위를 둘러보면 온 천지에 역귀가 출몰하여 기승을 부리는지 암담한 이야기만 들려온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의 뜬금없는 계엄령이 초래한 후폭풍으로 인해 국제적으로 거의 왕따 당하다시피하는 대외환경, 사분오열된 국론과 혼돈 속에 끝모르게 추락하는 경제에 백성의 애환만 깊어간다. 대내외적으로 이렇게 악재가 겹겹이 쌓인 적이 전에도 있었던가.
동지 팥죽으로 역귀를 물리칠 수 있다면 온 천지에서 팥죽을 쑤어 치성을 드리는 캠페인을 벌이는 게 어떨까. 그렇게 해서 이 땅에 드리워진 검은 장막을 걷어 올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국난즉사양상(國難則思良相)이라고 했다. 이 혼란스런 상황을 정리하고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갈 현인은 정녕 어디에 있는 것일까.
갑진년 동지의 기나긴 밤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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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여.
박정희 대통령이 그리워 지고여